요한복음 9:13-23
요한복음 9:13-23 진실의 눈부심과 두려움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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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기득권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두려움의 감옥'에서 벗어나, 내 삶에 일어난 은총의 사건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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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게 된 사내를 앞세우고 바리새인들의 조사가 시작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이에게 빛을 선물한 사건 앞에서도, 그들의 관심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안식일 규정'이라는 법전의 문구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요 9:16). 그들에게 종교는 고통받는 자를 품는 따뜻한 품이 아니라, 자신들의 질서를 위협하는 이들을 걸러내는 차가운 체(sieve)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체제(system)'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곤 합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생명의 역동성보다 규정의 완고함을 앞세우는 종교의 모습에 절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을 뜬 사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했습니다. 진실이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관을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진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용기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용기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사내의 부모가 소환됩니다. 그들은 아들이 눈을 뜬 경이로운 사건의 목격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 지금 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요 9:21)라며 뒤로 물러섭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유대인들을 무서워함이라"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출교의 공포가 자식에게 임한 하늘의 은총을 증언할 입술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내 삶에 임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렇다'고 말하는 정직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평판, 공동체에서의 소외, 혹은 내가 가진 안정이 깨질 것에 대한 불안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침묵하게 만들지는 않습니까?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두려움의 그늘을 벗어나 빛의 자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단한 신학적 변증을 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저 내가 본 것, 내가 경험한 그분의 따뜻한 손길을 정직하게 드러내길 기다리십니다.
종교적 도그마에 갇힌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려움을 뚫고 "그는 선지자니이다"라고 고백한 사내의 눈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비겁한 침묵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든 은총의 흔적들을 노래합시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진실을 말할 때, 세상의 낡은 껍질은 깨어지고 생명의 눈부신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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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13-23 차가운 정답의 감옥을 허무는 은총, 그 눈부신 ‘안식’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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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앙상한 교리와 타인의 시선이라는 두려움에 갇혀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덧거친 상처를 어루만지며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의 은총을 매일의 ‘밥상’처럼 달게 받아먹으며 참된 ‘안식’을 누리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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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던 겨울의 칼바람이 부드러운 미풍으로 바뀌고, 얼어붙었던 대지 아래서 생명의 수맥이 약동하며 기어코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는 3월 초입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짙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신앙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참으로 피곤합니다. 끊임없이 자격을 묻고, 잣대를 들이대며 우리를 평가하려 듭니다. 놀랍게도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풍경 역시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9장의 본문은, 평생을 어둠 속에 갇혀 살다 예수님의 은혜로 맑은 눈을 뜨게 된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종교 지도자들의 기막힌 심문 장면을 보여줍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눈을 떴다는 소식은 온 동네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요 9:13).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한 영혼이 흑암에서 빛으로 나아왔다는 ‘생명의 기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그 일이 ‘안식일’에 벌어졌다는 데 있었습니다(요 9:14-16). 그들은 치유 받은 자를 앞에 두고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며 차가운 교리의 칼날을 휘두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이라는 자신들만의 앙상한 모범답안에 갇혀 있었기에, 눈앞에서 찬란하게 피어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생명의 기쁨을 축하해주기는커녕 집요하게 캐묻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언어는,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가장 차가운 얼음장이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치유 받은 자의 부모가 보인 태도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불러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너희 아들이 맞느냐”고 다그치자, 부모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칩니다.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요 9:21). 그들은 아들이 눈을 뜬 경이로움보다,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출교의 두려움’(요 9:22)이 더 컸기에 자기 혈육마저 차가운 심문대 위에 홀로 버려두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도 이 부모처럼 두려움에 쫓겨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서, 완벽한 그리스도인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늘 위축되어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 열심을 내지 못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자책하며 회의에 빠진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차갑고 두려운 율법의 심문실을 빠져나와,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의 따뜻한 은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에서 김병년 목사님은 “묵상은 안식이다”라고 정의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라고 다그치는 이기적인 욕구와 세상의 통제되지 않는 탐욕을 거절하고 물리치는 거룩한 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킨다며 진짜 안식을 파괴했지만, 참된 묵상은 내 힘을 빼고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영혼의 긴장을 푸는 일입니다.
또한 옥명호님은 묵상을 가리켜 “밥상”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한 날 먹는 화려한 만찬이 아니라, 매일매일 피곤한 일상 속에서 허기진 영혼을 채우기 위해 차려내는 소박하지만 필수적인 식탁입니다. 맹인이었던 자가 눈을 뜬 후 그가 할 일은 신학적인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임한 그 놀라운 빛을 매일의 밥상처럼 감사함으로 누리고 삼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교리적인 정답을 완벽하게 꿰고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각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의로움이나 대단한 헌신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맹인의 비루한 일상 곁에 다가오셔서, 진흙을 이겨 바르시며 기어코 닫힌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다정한 긍휼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길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 낙심될 때,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율법적인 부담감을 십자가 앞에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정답을 요구하는 세상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너는 내가 피로 값 주고 산 내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영혼의 주파수를 맞추십시오.
우리가 주님이 차려주신 은총의 밥상 앞에 둘러앉아 그분의 말씀을 묵상으로 달게 받아먹을 때, 우리 영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타인의 시선이나 두려움의 껍질을 벗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빛 가운데로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는 복된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단단하게 닫혀 있던 ‘씨앗’이 햇살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껍질을 부수려 발버둥 치는 것은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따사로운 봄볕(은총)이 대지를 데우고 묵묵히 씨앗을 품어줄 때, 씨앗은 그저 그 온기를 빨아들임(묵상)으로써 자연스럽게 굳은 껍질을 열고 나와 맑은 하늘을 향해 생명의 잎사귀를 펼치게 됩니다. 내 힘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수고를 멈추고 주님의 은총을 밥처럼 먹고 마실 때, 우리 영혼은 기어코 찬란한 생명의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