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자의 어둠, 보는 자의 빛

요한복음 9:24-41

요한복음 9:24-41 아는 자의 어둠, 보는 자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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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신학적 지식으로 진리를 소유하려는 오만을 버리고,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며 나를 찾아오시는 인자의 빛 앞에 영혼을 개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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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사내와 종교적 권위를 쥔 바리새인들 사이의 대화가 점입가경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며 이미 결론을 내린 채 사내를 압박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아노라'는 지식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가로막는 단단한 벽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타자를 심판하는 자리에 앉게 되고, 정작 눈앞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에는 눈먼 자가 되고 맙니다.

주님은 지식의 유희 속에 갇힌 이들을 향해 실존적 증언으로 응수하는 사내를 세우십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거창한 교리의 미로에서 길을 잃곤 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신앙은 복잡한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임한 구체적인 은총의 사건—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온 그 찰나의 경험—을 붙들고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입니다.

주님은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난 그 사내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종교적 체제는 그를 버렸으나, 생명의 주님은 그를 환대하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는 질문에 사내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답하며 엎드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역설을 봅니다.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며 지식을 뽐내던 이들은 심판의 어둠 속으로 잦아들고, 자신의 눈멀었음을 인정하고 빛을 갈구했던 이는 인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철학자 에릭 호퍼는 "배우는 자들은 세상을 물려받지만,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기에 적합하도록 무장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역시 '다 안다'는 종교적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완벽한 지식을 갖췄을 때가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그분의 빛 앞에 우리 존재를 노출할 때 흘러들어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신학자가 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분의 빛을 받아 세상을 새롭게 보는 '보는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주님의 이 서늘한 경고를 가슴에 새깁시다. 아는 자의 교만을 내려놓고, 매일 아침 창을 여는 심정으로 주님의 은총을 기다립시다. 우리가 자신의 어둠을 인정할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세상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 눈부신 빛의 사귐 속으로 우리 함께 나아갑시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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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24-41 다 안다는 오만의 성벽을 허물고, 참된 빛으로 걸어 나오는 ‘번역’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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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규정짓는 영적 맹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울타리 밖으로 쫓겨난 우리를 친히 찾아와 만나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내 삶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거룩한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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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매섭던 겨울바람이 자취를 감추고,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기어코 연초록 생명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3월의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짙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참으로 소란스럽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옳고 똑똑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내가 가진 파편적인 지식과 경험이 세상의 전부인 양 타인을 쉽게 재단하고 평가하는 오만함이 공기처럼 떠다닙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9장 후반부의 예루살렘 성전 뜰 역시, 다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차가운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 심문합니다. 그들은 위압적인 태도로 말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 이 얼마나 기막힌 모순입니까? 그들은 율법의 전문가였고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연구한 자들이었지만, 정작 눈앞에서 한 영혼을 어둠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지 못했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진리를 대할 때 이미 자기가 정해놓은 ‘모범답안’을 확인하려 하거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탐욕을 비워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종교적 기득권과 신학적 틀이라는 모범답안에 갇혀 있었기에, 그 틀을 벗어나는 예수님의 은혜를 ‘죄’로 규정해 버린 영적 맹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을 뜬 사람의 대답은 투박하지만 명쾌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바리새인들의 말은 사람을 정죄하고 억압하는 차가운 얼음장 같았지만, 은혜를 체험한 이 사람의 고백에는 생명을 되찾은 자의 펄펄 끓는 뜨거운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 분노한 종교 지도자들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며 그를 회당에서 쫓아내 버립니다(요 9:34). 유대 사회에서 회당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이자 철저한 고립을 의미합니다. 진실을 말한 대가로 그는 또다시 세상의 울타리 밖으로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가장 가슴 벅찬 은혜의 장면은 바로 다음에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요 9: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틀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우리를 밖으로 밀어내지만, 예수님은 쫓겨나 홀로 웅크리고 있는 바로 그 변두리의 자리, 실패와 고독의 자리로 친히 걸어오셔서 우리를 ‘찾아내어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영광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곁이 되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벅찬 은혜를 우리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가리켜 “번역”입니다. 묵상은 성경의 문자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해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구체적인 일상과 관계 속에서 내 삶의 언어로 생생하게 번역해 내는 작업입니다. 또한 묵상은 “혁명”입니다. 다 안다는 나의 교만,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던 나의 낡은 세계관을 뒤엎고,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나라가 내 존재의 중심에 임하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거룩한 쿠데타입니다. 눈을 뜬 맹인은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내가 믿나이다”(요 9:38)라고 고백하며 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체험한 자가 삶으로 번역해 낸 가장 위대한 묵상의 혁명이었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성경 지식도 얕은데, 과연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 하며 회의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세상의 잣대에 비추어 볼 때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위축되어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 열심을 내어 완벽한 모습을 증명해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에 짓눌려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무결점인 사람, 모든 신학적 지식을 통달한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나는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맹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헌신의 크기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쫓겨난 자의 슬픔 곁으로 다가와 눈을 맞춰주시는 주님의 그 맹렬한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제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율법적인 부담감과 낡은 성벽을 십자가 앞에 무너뜨리십시오. 정답을 강요하는 세상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영혼을 맡기십시오. 오늘도 “다 안다”는 오만을 비워낸 빈자리에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채워 넣으며, 그 은혜를 이웃에게 다정한 손길로 번역해 내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오래된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내는 ‘탁본(拓本)’과 같습니다. 어두운 밤이나 비바람 속에서는 돌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위에 부드러운 화선지를 덮고 묵묵히 먹을 두드리는 시간(묵상)을 거치면, 캄캄해 보이던 종이 위로 보이지 않던 깊은 진리의 글귀가 선명하고 하얗게 떠오릅니다. 세상의 모호함 속에서 내 힘으로 길을 찾으려 발버둥 치는 대신, 주님의 은혜라는 화선지를 내 삶에 덮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낼 때, 우리의 남루한 일상 위로 기어코 찬란한 생명의 말씀이 탁본처럼 아로새겨질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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