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01-20
창세기 23:01-20 죽음의 자리에 심은 약속의 씨앗, 정당한 값으로 빚어낸 거룩한 환대와 소망
*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12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1-2절). 아브라함은 아내의 매장지를 구하기 위해 그 땅의 원주민인 헷 족속에게 나아가 자신을 '나그네와 거류하는 자'로 소개하며 매장할 소유지를 요청합니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존경하며 호의를 베풉니다(3-6절).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소유인 막벨라 굴을 특정하여 정당한 값을 치르겠다고 요구하고, 에브론이 무상으로 주겠다는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며 은 400세겔이라는 막대한 값을 정확히 달아 지불합니다(7-16절). 이 합법적인 거래를 통해 막벨라 굴과 그 주위의 밭이 아브라함의 확고한 소유로 확정되고, 비로소 사라는 약속의 땅에 묻히게 됩니다(17-20절).
*
#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에서 성문 앞은 재판과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공적 장소였습니다. 에브론이 밭과 굴을 "거저 주겠다"고 한 것은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상거래 예의이자 흥정의 기술이었습니다. 만약 거저 받았다면 언제든 소유권을 다시 빼앗길 수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상인의 저울로 정확히 은 400세겔을 달아 주어(당시 은 400세겔은 밭의 가치를 훨씬 웃도는 막대한 금액으로 추정됨) 영구적인 법적 소유권을 확정지었습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나안 온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12:7 등)을 받았으나, 살아생전 그가 실제로 합법적 소유권을 획득한 땅은 이 '무덤' 하나뿐이었습니다. 창세기 23장은 아브라함 세대에서 이삭 세대로 넘어가는 세대 전이의 과정을 보여주며, 이 무덤은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훗날 이스라엘 후손들이 출애굽 하여 돌아와야 할 '약속의 보증수표'이자 소망의 씨앗이 됩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빌미로 원주민들의 땅을 무력으로 빼앗거나 종교적 특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세상의 법과 상식, 예의를 존중하며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는 신앙인이 세상 속에서 비신앙인들과 어떻게 평화롭고 윤리적인 '수평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모범입니다. 송민원 박사의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제시하는 ‘수평적 읽기(Horizontal Reading)’는 성경을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계시와 복종의 틀로만 읽지 않고, 인간과 인간, 신앙인과 비신앙인, 그리고 교회와 세상이라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 신앙의 공공성과 윤리적 책임을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돕습니다.
*
# 1-2절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애통 : 평생을 동고동락한 언약의 동반자를 잃은 상실의 아픔과 죽음이라는 현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에게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슬픔을 허락하시며, 우리의 애통과 눈물을 통해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게 하시는 위로의 주님이십니다.
.
사라가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12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해합니다.
.
사라는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그 수명(향년)이 정확하게 기록된 여성입니다. 이는 그녀가 구속사에서 차지하는 언약의 동반자로서의 위상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슬퍼하며 애통했다(싸파드, 바카)'는 표현은 가슴을 치며 소리 내어 우는 극심한 슬픔을 의미합니다. 수평적 읽기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위대한 신앙의 영웅이기 이전에 아내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연약한 한 인간입니다. 믿음이 깊다고 해서 이별의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의 한계 상황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직시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눈물은 평생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고향을 떠나 장막 생활을 함께 견뎌준 아내에 대한 헌사이자, 죽음 앞에서의 실존적 고뇌입니다.
.
오늘날 우리 사회는 죽음을 병원과 장례식장이라는 격리된 공간으로 밀어내고, 슬픔마저도 효율적이고 빠르게 처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질병과 사별의 아픔을 겪는 지체들의 슬픔(애통)에 얼마나 깊이 연대하고 있습니까? 남편을, 아내를, 부모를 잃은 자들의 상실감을 "천국 가셨으니 기뻐하라"는 가벼운 말로 덮어버리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충분히 슬퍼하고 함께 울어주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눈물의 자리에서 비로소 참된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됩니다.
*
# 3-6절 나그네의 겸손과 세상의 존경 :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나그네로 낮추는 신앙인과,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세상.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특권을 주장하지 않고 겸손히 섬길 때, 세상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지도자'로 높여 주시는 명예의 주관자이십니다
.
아브라함이 시신 앞에서 일어나 헷 족속에게 나아가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매장할 소유지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향해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며 칭송하고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장사하라고 호의를 베풉니다.
.
아브라함은 헷 족속 앞에서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헷 족속의 땅에 얹혀사는 "나그네(게르)"이자 "거류하는 자(토샤브)"임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수평적 관점에서 이 대목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 땅을 내게 주셨다!"라며 배타적인 종교적 특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사회적 소수자로서 현지인들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예의를 갖추어 접근합니다. 놀랍게도 헷 족속(세상)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나시 엘로힘)"로 인정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방식, 그의 이웃 사랑, 평화로운 공존의 태도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기에, 비신앙인들의 입에서 그를 향한 최고의 찬사가 터져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과 맺는 '수평적 관계'를 날카롭게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적 우월감에 빠져 세상의 상식과 법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재개발 과정에서 억지를 부리거나, 지역 사회와 마찰을 빚으면서 그것을 '영적 전투'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권위는 우리가 스스로 주장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과 예의를 다하며 그들을 존중할 때 비신앙인들의 입을 통해 주어집니다. 직장과 세상 속에서 나는 배타적이고 무례한 기독교인입니까, 아니면 동료들로부터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입니다"라는 인정을 받는 인격자입니까? 특권을 내려놓고 나그네로 섬길 때 교회는 세상의 존경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
# 7-16절 거룩한 거래와 정당한 지불 : 값싼 호의나 불의한 이득을 거절하고, 온전한 대가를 지불하여 수평적 정의를 세우는 윤리적 결단.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맺는 경제적, 사회적 관계 속에서 투명하고 정직하게 행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
아브라함은 몸을 굽혀 에브론의 소유인 막벨라 굴을 "충분한 대가"를 받고 내어주기를 청합니다. 에브론은 밭과 굴을 "내 주께 드리겠다"고 여러 번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거듭 몸을 굽히며 밭의 값을 지불하겠다고 고집합니다. 결국 에브론이 "은 400세겔이나 그것이 당신과 내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넌지시 말하자, 아브라함은 즉시 상인의 저울로 달아 은 400세겔을 지불합니다.
.
고대 근동의 문학적, 상업적 관습을 이해해야 합니다. 에브론이 "거저 주겠다"고 한 것은 진짜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체면을 치레하는 흥정의 전주곡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땅을 호의로 거저 받았다면, 법적 소유권은 여전히 헷 족속에게 있어 훗날 언제든 쫓겨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은 400세겔"(당시 평범한 밭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막대한 금액)이라는 에브론의 바가지성 부름에도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지불합니다. 수평적 읽기에서 아브라함의 이 '정당한 지불'은 세상과 맺는 성도의 경제 윤리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는 창세기 14장 소돔 왕의 전리품을 거절했던 것처럼, 세상 사람에게 어떤 '부채 의식'도 남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신앙인은 공짜를 바라거나 값싼 온정주의에 기대지 않고, 온전하고 투명한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지켜낸 것입니다.
.
경제 활동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은혜로 합시다", "같은 교인끼리 왜 이래"라며 계약서를 대충 쓰거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법망이나 제도를 교묘히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취하려는 태도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즈니스를 하거나 물건을 살 때, 이웃의 노동과 소유에 대해 정당하고 때로는 후한 값을 치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치르는 땀방울과 정직한 세금, 정당한 지불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입니다.
*
# 17-20절 약속의 땅의 첫 소유와 영원한 소망 : 죽음의 장소(무덤)를 돈으로 사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소망을 담은 언약의 씨앗으로 심는 신앙.
하나님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이 고작 '무덤 한 평'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보증하시고 세대를 이어 약속을 성취하시는 신실한 언약의 주님이십니다.
.
마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그 속의 굴, 그리고 그 사방 경계 안에 있는 모든 나무가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됩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합니다.
.
17절과 18절은 마치 오늘날의 부동산 매매 계약서처럼 상세하고 법적인 용어들(밭, 굴, 나무, 사방 경계, 증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생 장막에 살며 땅 한 평 없던 나그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으로 법적 소유를 갖게 된 곳이 바로 '무덤(막벨라 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장지가 아닙니다. 사라는 죽었지만, 이 무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12:1, 7)의 첫 번째 물리적 성취이자 씨앗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현실의 화려한 궁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부활과 약속의 성취를 믿으며 '미래를 향한 거점'을 구매한 것입니다. 이후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도 이 굴에 묻히며, 애굽에 있던 요셉도 자신의 해골을 이곳으로 메고 가라고 유언합니다. 막벨라 굴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죽음조차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영원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자녀들에게 남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갑니까? 넓은 아파트와 통장 잔고입니까?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여 얻은 재물로 사야 할 '막벨라 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장 내 눈앞에서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찾아올 수 있는 '영적인 거점'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 진리와 사랑의 나무를 심고, 부활의 소망을 증거하는 거룩한 막벨라 굴이 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취(부동산)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언약)을 바라보며 오늘 나의 자원과 시간을 가치 있게 투자하십시오.
*
# 거둠의 기도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원한 소망의 씨앗을 심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굴을 구매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나그네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깊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서 특권을 요구하며,
무례하고 배타적인 태도로 이웃과의 수평적 평화를 깨뜨렸음을 회개합니다.
주님, 아브라함처럼 세상 한복판에서 겸손의 옷을 입게 하옵소서.
"당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입니다"라는 세상의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이웃의 수고에 정당한 값을 치르며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값싼 은혜나 불의한 이득에 타협하지 않고,
거룩한 자존심을 지켜내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한 것이 보잘것없는 '무덤 한 평'과 같을지라도,
그것이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영원한 약속의 거점이 됨을 믿습니다.
사라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약속의 씨앗을 심었던 그 믿음으로,
오늘 우리도 가정과 교회와 일터 속에
영원한 소망의 씨앗을 심는 거룩한 나그네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자 산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