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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Oct 07. 2017

예레미야 11:09-17 언약을 깨는 반역은 재앙을 초

렘 11:09-17

예레미야 11:09-17 언약을 깨는 반역은 재앙을 초래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반역하여 조상들의 죄악으로 돌아가 언약을 깨뜨렸음을 고발합니다. 이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에게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명하는데 이스라엘은 여전히 제의적으로만 해결하려 할 뿐 정작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9-10절 반역은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행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 사이에 있는 반역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전철을 따라 여호와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다른 신을 섬기므로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지금까지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은 반역이었습니다. 망해가는 유다의 상황을 안타까워하시며 선지자를 통해서 돌이키도록 예언하시며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한는 일입니다. 장차 올 재앙에서 살아날 길을 예배하시고 그렇게 살아가길 원하셔서 오래 참으시므로 모든 것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창조하심과 구원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주권을 가지신 왕됨을 부인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 하나님 아닌 것을 왕으로 삼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배은망덕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호와의 말씀 듣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다른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던 그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신앙은 정치입니다. 정치는 누가 왕이냐의 싸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왕됨을 거역하고 우상을 왕으로 삼은 반역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온전한 기억이 오늘의 신앙을 결정합니다. 지금 진행되는 정세에 대한 상황을 말씀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라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며 귀기울여 주의 말씀 듣기에 힘씁니다. 생사화복이 주께 있음을 믿는 자만이 주님의 뜻과 마음 그리고 계획하심에 관심을 가지고 날마다 주 앞에 나아가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무시하고, 탐욕에 눈이 멀고, 하나님 아닌 것을 왕으로 모시는 우상숭배는 결국 반역의 길이며 자멸의 길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깨는 행위로서 응당 이 언약을 깨는 자에게 주어지는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11-13절 반역에 대한 재앙은 소통의 단절로서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재앙은 필연입니다. 이 재앙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의 중보도 듣지 않으시고 그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부르짖어도 구원해 낼 수 없는 재앙입니다. 비록 그들의 섬기던 신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고 누구도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내린 재앙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반역에 대한 필연적 재앙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지라도 이제 여호와는 반역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참으셨고 기회를 주었으며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심지어 재앙이 내려와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그토록 의지하고 분향하며 제단을 쌓은 신들의 숫자가 허다하다 하더라도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시작되면 누구도 여기에서 절대로 구원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전에도 말씀하셨듯이 우상은 무지하고 무능하며 헛되고 헛된 정말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이며 생명도 능력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지 않으니 대번에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게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겠지만 구원의 문이 닫힌 것이니 누구도 열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만왕의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창조주 구원주 재림주 심판주로서 주되심에 대한 고백이 일순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 아닌 것을 왕으로 섬기며, 종노릇 하던 데에서 참된 왕, 진짜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왕이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되고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만왕의 왕되신 주님을 고백하고 그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이 거룩한 백성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입니다. 종과 백성, 자녀와 양은, 주되시며 왕되시고 아버지요 목자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되신 주님의 음성 듣기를 거절한다는 것은 심각한 반역으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거역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소통을 거부하고 말씀을 듣지 않게 되니 여호와께서도 더이상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일방적 간구만 있다면 기도마저도 우상숭배하는 이들과 변별력 없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만든 우상일 뿐 하나님을 자기 욕심과 소원을 들어주는 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대로 구하기만 할 뿐 정작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귀기울이지도 관심도 없고 듣지 않기에 순종하는 삶도 없습니다. 오직 탐욕에 점철된 헛된 것으로만 가득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상은 성읍의 수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하고 많습니다. 모두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고 따르는 것 같지만 각자가 만든 우상에게 절하고 예배하고 제물을 바치면서 결국 자신의 탐욕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재앙이 멀지 않은 모습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이 과연 여기에서 멀까요? 그래서 주님의 주 되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귀기울이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이 낯설게 다가오나요? 아님 익숙한가요? 



14절 반역은 중보마저도 소용없게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예레미야에게 반역한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합니다. 그들을 위해 부르짖고 구해도 또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여호아ㅗ께 부르짖어도 더이상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호와의 왕되심을 거역하는 반역은 결국 언약을 파기한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셔서 부르짖음에 응답하고 소통하여 인도와 보호와 공급하시겠다는 모든 것들을 단절하고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생사화복을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들에 의존했기에 결국 구하는 대상도 이미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우상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을 아시므로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시지만 이제 이스라엘이 절박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는 간구를 할 지라도 이미 때는 늦어서 더이상 여호와께서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여호와께 아룁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이 단절되어버리는 것은 결국 죽음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늘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귀가 더 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간구는 구하지 않아도 필요를 아시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간구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이미 여호와의 의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의와 욕망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여호와께서 들으실리 만무한 것입니다. 반역은 이토록 모든 관계를 깨고 다시 하나님과 단절되고 깨어진 관계가 되어 죄와 사망 아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반역에 대한 재앙은 그 어떤 제의적 행위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여호와의 집에서 꾸미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물로 자신들에게 임한 재난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재앙 선포에 대해 반응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제물과 제사를 드리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악한 음모라고 말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는 삶의 열매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과 제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호와를 향한 기만이며 열납되지 않는 빈껍데기 예배이며, 향기없는 예배이며, 우상숭배와 같은 제의일 뿐입니다. 그들 생각처럼 제사로 재앙을 비껴 나갈 수 있었다면 기뻐하겠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신앙은 예배당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가장과 직장 그리고 세상에서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는 일,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고민하고 품고 묵상하는 것, 그리고 되새김질하면서 고민하고 기억하고 선택을 좌우하게 하는 가치, 간절한 열망을 갖고 추구하는 것, 하루나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은 시간 동안 지배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가치요 왕이요 주인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 아닌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자신에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따라 살면 우상을 닮아가서 무지하고 무가치하고 무자비하며 무의미한 삶으로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탐욕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기껏 예배당에서 예배하며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고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신앙과 제의는 껍데기 일뿐 하나님께서 받으시거나 기억하시거나 인정할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제의는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난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제의적인 예배,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삶의 예배, 그리고 골방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며 드리는 개인 예배, 이렇게 공동체와 삶과 개인의 세 가지 예배가 일치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정의와 공의의 열매와 개인의 삶의 변화가 수반되어 일치된 예배를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드리는 합당한 예배,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린들, 아무리 많은 제물을 드린들 그것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제물이 아니라 기억되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아무런 역사도 응답도 없는 껍데기 예배일 뿐입니다. 정말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지 그래서 합당한 예배인지 점겅해야 합니다. 



16-17절 반역은 결국 재앙을 불러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세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반역은 하루아침에 좋은 나무가 꺾여 버리게 합니다. 바알에게 분향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일으켰고,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뜻을 이루는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맺기를, 여호와께서 꿈꾸시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세상을 만들어 늘 좋은 열매를 맺는 푸른 나무로서, 돌감람나무였던 이스라엘을 참감람나무가 되게해 주셨습니다. 이를 언약하시고 신실하게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반역은 하루아침에 이 모든 역사를 버리고 잃어버리고 깨어지게 했습니다. 바알에게 분향하면서 여호와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려 했고, 여호와의 뜻을 구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여호와의 노여움을 샀으며,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왕이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왕으로 섬기는 악을 행하므로 말미암아 만군의 여호와의 재앙을 선고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 감람나무 같던 우리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고, 죽은 것같은 우리를 참포도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 맺어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백성, 거룩한 나라로 변화되고 열매맺는 복있는 자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그 복된 길을 거절하고 참감람나무 참포도나무에서 떨어진다면 우리는 살아 잇으나 죽어 있는 자로 사망의 종노릇하는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부지런히 심을 열매가 무엇인가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곧 성령의 소욕을 따라 주를 따르고 위해서 살아가는 성령의 열매인가요? 아니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욕심으로 점철되어 가는 탐욕의 열매인가요? 화로다 나여 하시는 여호와의 재앙이 아니라 복되도다 내백성이여 하시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열매 맺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기도

언약에 신실하고 

우리 왕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지금도 우리 삶에 잔재하고 있다면

오늘 그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주님 계신 곳 하늘에서 

날마다 우리의 간구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날마다 뵈옵기를 기뻐하는 믿음 주옵소서. 

탐욕에 점철된 수많은 우상들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확신있는 믿음 주옵소서. 

우리의 중보의 능력이 깨어지지 않게 하옵시며

우리 주 예수님의 중보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을

늘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도 주님의 이름에 힘입고

도고할 때에 주께서 들어주시길 원합니다. 

날마다 공동체와 삶과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일치된 예배, 합당한 예배자로 살게 하옵소서. 

원래 우리를 좋은 나무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세워주셨듯이 

좋은 열매 맺는 나무로 살게하시고

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아름다운 나무 되고

사시사철 열매 맺는 푸른 나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열매 맺는 감람나무 되게 하옵소서

잠시라도 왕되신 주님을 거역하거나

주의 분노를 사는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악한 일에 미혹되거나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피할 수 없는 재앙을 부르는 삶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로서의 삶, 복을 부르는 살아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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