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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Oct 10. 2017

예레미야 11:18-12:06 예레미야의 고백 1

렘 11:18-12:06 

예레미야 11:18-12:06 예레미야의 고백 1 ; 악인의 형통 앞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한 내용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현실을 접하고 탄식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실 것에 대해서 재확인합니다. 예레미야는 부당한 현실이 지속되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질문하는데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계속 악에 맞설 것을 요구하십니다. 


*

“예레미야의 고백” 다섯 군데 - 11:18~12:6; 15:10~21; 17:14~18; 18:18~23; 20:7~18 : 예레미야의 고백은 당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고향(아나돗)에서 마저도 배척당할 만큼 당시 사회의 뿌리를 흔드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예언을 계속하는 가운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보호와 함께하심에 대한 약속이 이어지지만 많은 곤경과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수년 동안 살며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기도와 부르짖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내용들이 “예레미야의 고백”이라 불립니다. 이  고백들은 예레미야의 말이지만 그의 인격과 선포하는 내용들을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8-20절 정의를 외치는 여정에는 저항과 고난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통해서 대적들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적들은 예레미야를 해하여 그의 이름이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도록 박멸하려 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께 호소하며 자신의 처지를 여호와께 의뢰합니다.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겨서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제의의 헛됨을 지적하고, 제의적으로만 화려할 뿐 실제 삶과 사회 속에서는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고발하는 예레미야의 말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의 지도자와 백성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자신들의 신앙과 정통 그리고 삶에 있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제의 그리고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모든 언행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근간을 뒤흔드는 예언이었기에 자신들을 돌아보고 참된 여호와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예언자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끌어다가 나무와 열매 곧 예레미야의 모든 행적들과 말을 흔적도 없이 제거해 버리려는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여호와께서 예레미야가 알게 하신 것입니다. 공의로 판단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감찰 하시는 여호와께 예레미야는 자신의 원통함을 의뢰하고 여호와께서 심판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바른 말씀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길과 지식과 모든 언행들이 여호와 앞에 바른 지 돌아봅니다. 하지만 악인은 바른 말씀을 듣게 되면 자신이 굽어진 것을 보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신을 깨우고 비뚤어진 것을 가리기 위해서 바른 말씀을 없애는 방편을 택합니다. 수많은 독재자와 권력을 가진이들이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일을 자행해서 많은 의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운 사실을 알고도 의인들은 정의를 외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런 이들의 외침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굽어진 것들을 바르게 하는 일들을 함께 이루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이루어 가는 일들을 진행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여정, 말씀의 여정, 하나님나라의 역사에는 자신이 주인이고 헛된 것들의 종노릇하는 굽어진 것들의 저항과 득세함을 통하여 고난의 현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러한 저항 앞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올곧게 갈 수 있는 용기있는 믿음을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 혹여 마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현장에서 주를 부인하며 정의를 외면하는 일이 없길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 참고 : 20절 ‘그들에 대한 주의 보복을 보리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레미야서에는 보복의 요청이 다른 선지자들보다 많습니다. 이것은 사법정의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고발할 때 누가 죄인인가에 대한 판단을 고대세계에서는 간단하게 한 사람이 죄인이면 다른 사람은 죄인이 아닌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보복해 달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고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보복’이라는 단어를 선지서에서뿐 아니라 시편에도 등장합니다. 결국 이렇게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죄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복주는 긍휼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1-23절 정의를 외치는 자의 입을 막는 이는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향(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벌하는 날에 철저하게 재앙을 내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을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아나돗 사람들이 행하려는 음모를 알고 계셨으며 그것을 예레미야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이유는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고 신명기 율법(신 13:1-15)에 따라 그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 근거는 본문에서 말하고 있진 않지만 고향 사람들이 이토록 분노한 이유가 우선 예레미야의 예언이 지방 제사장들의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요시야 왕의 성전 중심의 개혁을 지지하므로)이거나 또 다른 정치적인 어려움을 가져온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은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레미야는 계속 저주를 선포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전쟁의 상황에서 재앙으로 곧 젊은이들은 전쟁에 나가서 칼에 죽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전쟁으로 황해진 상황에서 어린 아이들은 기근으로 굶어 죽을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자행한 이들을 여호와께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징벌은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는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전 587년 유다의 멸망을 예고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 참고로 포로에서 돌아오는 귀환민들의 명단에는(에스라 2:23; 느헤미야 7:27) 128명의 아나돗 사람들이 유배에서 돌아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심판의 철저성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이를 문맥과 문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한계와, 자신들의 변질된 신앙의 현주소를 직시하지 못하고 결국 예레미야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고향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일에 열심을 품은 만큼 지금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겸손히 주님을 알아가는 일을 열심으로 행할 수 있으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 앞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겸손함으로 주님을 알아가고 배우는 일에 겸손히 임할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겸손함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12:1-2 악인들이 형통하여 정의가 굽어지는 것 같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의로우심을 고백한 후에 질문합니다. 그것은 지금 악인들이 형통하고 반역한 자들이 평안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급기야 그들을 주께서 심어서 이렇게 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그들은 주님께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은 먼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11:20에서 여호와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적들의 잎이 주께 가까운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은 멀다라는 말을 예레미야가 여호아께 고발 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들이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번영을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인과응보적인 상황으로는 악인이 벌을 받고 의인이 상을 받아 잘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한데 오히려 의인들은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악인은 더욱 창대해 져서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은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결국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들 곧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끝에서 악인의 심판과 멸망 의인의 회복과 소망은 불변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다만 지금의 불의한 현실을 바라볼 때 주님을 소망가운데 신앙하면서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주께 맡기면서 주님이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우리는 오늘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맡기고서 다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한걸음씩 그렇게 조금씩 주의 인도를 따라 갈 수 있길 원합니다. 



3-4절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되어 의인이 감당할 고난의 여정이 오래 일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시고, 자신을 보고, 자신의 마음이 주를 향한 것을 주께서 ‘감찰’하신다면  자신이 아니라 대적들에게 벌을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언제까지 그 심판의 날을 기다려야 하는지, 대적들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자신들은 결코 재앙을 보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고 고발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대적들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모르고 심판을 지연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이 아직도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닥치는 고난들을 인내하며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핑계하고 심지어 정의에서 불의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악인들이 계속 득세하니 땅도 채소도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다고 호소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들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적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앞 날에는 관심이 없다고 떠들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급기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하나님이 관심이 없으시니 자신들의 결정권자가 되어서 살아가야 한다고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될 때 우리는 긴장을 늦추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정의와 종말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같아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계획들을 부정해 버리는 데까지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지연이 있을 때에는 인내로 경주 해 가면서 그 상황에서 우리가 누리거나 감당하거나 책임과 의무에 대한 부분들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결코 하나님은 심판을 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서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고난의 여정을 잘 감당해 나아가길 기대하고 계신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지연되는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간절히 구합니다. 



5-6절 하나님의 공의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고백의 대상입니다. 

예레미야의 탄식과 질문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책망의 말씀입니다.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한다면 진자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서는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질서가 잡힌 땅(평안한 땅)에서 걱정 없이 지낼 생각만 한다면 맹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요단의 울창한 숲처럼 거칠고 적대적인 환경에서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면한 어려움과 위협은 앞으로 닥칠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정도도 힘들다면 앞으로 더 큰 고난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믿는 믿음이 있을 때 그래서 주를 의지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계속 정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공의도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요청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보호와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대적들의 배반과 박해가 기다릴 뿐입니다. 대적들과 심지어 가족들이 감언이설로 예레미야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흔들림이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앞으로 닥칠 고난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악한 자들의 성공에 직면하여 야훼의 역사의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면 집안 사람들마저 하나같이 대적이 되었을 때 그 좌절과 고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남겨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계획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여호와께서 반드시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시며, 마침내 악인을 심판하고 보복하실 것에 대해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고백의 대상임을 알고 더욱 주님만 의지합니다. 



* 기도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악인들을 통해서 오는 고난의 상황을 맞닥뜨릴 때에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정의를 왜곡하고

교만한 모습으로 폭력을 행사 하려 할 때에

주님께 의뢰하면서 그런 이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대적들이 바른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며

위협하고 막으려 할 때

당당하게 끝까지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주관하시니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날을 고대하면서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뜨는 

지혜와 용기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악인의 득세에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고

이후로 더 큰 고난의 상황이 온다해도 

하나님의 공의는 신비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며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알고

이해보다 주님을 향한 신뢰와 고백

변함없이 갖고 살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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