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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Oct 18. 2017

예레미야 15:10-21 예레미야의 고백 2 ; 탄식하

렘 15:10-21

예레미야 15:10-21 예레미야의 고백 2 ; 탄식하는 신앙

어떤 중보자라도 바꿀 수 없는 긍휼없는 재앙에 대한 선포에 대해 예레미야는 탄식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재앙으로 괴로워 하는 상황을 여호와께 아뢴 것입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강하게 하고 예언한 대로 심판이 진행될 것을 천명하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향하여 속이는 시내같다고 심각하게 말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끝까지 예레미야를 도구로 쓰시며 건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10절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여호와께 호소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변하지 않는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며 스스로에게 재앙을 선포합니다. 그런 자신의 운명을 어머니께(하나님; 렘 1:5) 원망하듯 한탄합니다. 자신은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을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저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맡은 자로서 사역을 감당해 가는 예레미야는 회개의 촉구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진행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이들이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다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들이 드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했다면 궂이 이런 결과를 낳지 않았을 터이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드러내게하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대면하게 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은 죄인들에게는 분노하고 대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반응이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자신의 죄를 가리고 도리어 대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돈을 빌리지도 않았고 꾸어 주어 이자를 받은 것도 아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진심이 오해받고 오히려 저주를 받는 상황입니다.

진심으로 해안 일이지만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나게 했을 때 그것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심하게 반항하거나 저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곡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풀어 주시지 않으면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처럼 주님께 호소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11-14절 하나님의 위로는 고난의 때에 함께하시고, 약속하신 말씀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탄힉하는 예레미야를 햐아여 여호와께서는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두려움과 낙심 그리고 좌절의 상황에 있을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는 그를 강하게하고 복을 받게하고 원수들이 재앙과 환난의 때에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간구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예언하게 했던 말씀대로 하나님은 심판을 분명하게 진행할 것이기에 그들이 소중하게 새악하는 것들이 모두 약탈당하고 대적들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으로 끌려갈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여호와께서 힘 주시는 일만이 우리를 두려움 속에서도 인내로 경주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실패한 인생인가? 저주 받은 인생이 아닌가 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여호와께서는 복을 받게 할 것이라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복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되고 더불어 주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주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임마누엘이 가장 큰 복임을 믿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린 외로운 상황에서도 때가 되면 오히려 그렇게 떠났던 이들이 예레미야가 맞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도 여호와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한 북방의 군대를 꺽을 수 없습니다. 그 때가 되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소유들이 그리고 우상을 섬기며 탐욕의 산물로 모은 것들이 전부 탈취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모으는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은 여호와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행하게 한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의 패역함이 얼마나 여호와를 분노하게 했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낙심 될 때에,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할 때에 주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가다가 원치 않는 현실에 봉착했을 때, 믿었던 이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오해받는 현실이 지속될 때에,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닥쳐올 때에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의 진정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문제의 극복은 오직 여호와의 복주심과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가느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 아닌 것에 가치를 두고서 탐욕으로 무엇인가를 모아서 안심하고 안정을 보장받을 것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일찌감치 버리고 주를 앙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15-18절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기에 변함없이 사명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응답에 예레미야는 탄원을 쏟아 냅니다.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돌봐 주시며 박해하는 자를 보복하시고 오래참으심으로 멸망치 않게하시오며,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간구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 어디에도 소속할 수 없이 여호와의 분노를 채우고 살아가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과 상처가 더 중해지고 너무 고통스럽기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향하여 심각한 항변을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여호와께서는 물이 말라 속이는 시내처럼 신기루같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40여년을 예언하면서도 단 한번도 기적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자신을 왕따하고 대적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런 절망적 현실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는데 결국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여호와께서 오히려 신기루처럼 말라 속이는 시내같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탄원의 끝에 여호와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낸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케 하는 표현입니다.

탄식할 수 있습니다. 탄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국에 원망으로 귀결되어서는 안됩니다. 고통이 가중되어지고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너무 클 때 나도 모르게 여호와를 향하여 원망의 말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고립된 삶의 분노가 너무 커 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탄식과 탄원이 너무 과해서 그만 이스라엘이 범한 죄에 가까운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며 맘대로 웅덩이를 파서 다른 물을 두고 교만했던 죄입니다(렘 2장).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신기루같다고 표현하는 말은 결국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상황과 처지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그래서 탄식하고 탄원하는 상황에서도 원망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길 원합니다.


19-21절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헛된 것을 버리고 인내로 경주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멀리 가버린 것 같은 상황도 알고 계시기에 다시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잘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처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금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 함께하심과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의 탄원에 대해서도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도구로 쓰임 받는 중에도 교만하여져서 해서는 안될 언행을 담지 않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한대로 변하지 않는 현실이 지속된다 하더라고 악인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결고한 놋성벽이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대적(악인)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붙잡아 주셔야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시시때때로 탄식과 탄원을 통해 여호와께 간구하므로 여호와로부터 약속과 힘을 얻어 이 사역을 감당해 갈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이지 이해가 아닙니다.

말씀 사역을 감당하는 여정 속에서 인내가 요구됩니다. 자칫 욕심을 부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여호와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거나 여호와를 원망하여 가지 말아야 할 길과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품지 말아야 할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그래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무장하여서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이 여정을 완주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날마다 주의 인도와 구원을 바라며 한걸음씩 인내로 경주해 가길 원합니다.
 

* 기도
복의 근원 되시며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재앙같은 현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리가 고통스러워 인내하지 못하고
주님을 향하여 원망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주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인도와 구원이 늘 우리에게 있으니
변함없이 주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오해와 대적 속에서도
주께서 가라신 그 길을 올곧게 갈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 주옵소서.
속이는 현실이 지속되더라도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면서
헛된 것들을 버리고
악인들의 길에 동화되지 말고
견고케 하시는 주의 능력을 덧입고
오직 주님을 앙망하면서
이 구원의 길, 말씀의 길을
인내로 경주해 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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