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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Oct 16. 2017

예레미야 15:01-09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

렘 15:01-09

예레미야 15:01-09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예언자의 눈물의 간구(14:17-22)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재앙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진행하여 여러 민족 가운데 흩으실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그들의 멸망을 누구도 동정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도 더이상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재앙의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대적의 칼에 붙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1, 5절 여호와와 우리 사이에 중보자와 긍휼을 구하는 자가 없다면 더이상 희망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사무엘이 중보하다 하더라도 이 백성을 여호와 앞에서 쫓아낼 것이며,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며 울 자도, 평안을 물을 자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cf. 출 32:7-14; 민 14:13-20; 신 9:18-29)와 사무엘(cf. 삼상 7:8-9; 12:19-23; 시 99:6)은 구약의 대표적인 중보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온다 하더라도 예언자(공동체)의 간구(4:17-22)를 단호하게 거절하실 것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재앙이 내려져서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지게 되면 누구도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을 위해서 울 자도 없고 평안을 물을 자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잊혀져 버리고 사라져 버릴 것에 대한 강조된 표현입니다. 뒤이어서 이러한 재앙 곧 여호와와의 관계(거룩한 왕과 백성)으로서의 관계가 깨어진 이유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패역하고 반역하여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의 문제였음을 철저하나 재앙의 시행의지를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유기된 인간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긍휼, 자비, 인애, 사랑)가 나타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중보의 사역들이 다시금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하사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에 순종하며 여호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새백성(새인류, 새사람)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에게는 그러한 중보자들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왔건만 여호와를 배반하여 다시 이러한 중보가 소용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구원받은 이로 섰다가 다시 반역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던 우리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는데 또다시 반역의 길로 행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회복된 관계(구원)를 감사하며 기쁨으로 유지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또다시 제 길로 행하여 딴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2-4절 우리의 죄악이 여호와께서 택하여 모으신 것을 다시 흩어 버리게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쫓아내신다고 하시자(1절) 그럼 어디로 가리이까 묻는 질문에 여호와께서는 죽음과 칼과 기근과 포로로 가게 될 것이라고 천명하십니다. 이어서 네 가지(칼, 짖는 개,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로 벌하셔서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 버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위선적인 경건에 사로잡혀서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져 버린 이 백성,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고 기다리고 돌이키며 기회를 주어도 끝내 돌이키지 않는 이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단호하게 내리신 결정은 그들을 쳐서 흩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죽음, 칼, 기근, 포로 모두 전쟁의 상황을 통해 많은 이들이 칼과 기근으로 죽어갈 것이며 남은 이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돌 것을 함축적인 단어들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전쟁 후에 죽임당한 이들의 시체가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장사되지 못하고 거리와 들판에 내버려진 시신을 개들이 끌고 다니고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이 먹어 치웁니다. 무덤에서 안식을 찾지 못하고 저주받은 비참한 죽음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의 원인과 죄악의 근원을 므낫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므낫세는 이방 종교와 제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일월성신을 위해 재단을 샇고 자기 아들을 불가운데 지나게 하며 점과 사술을 행하여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한 자입니다(왕하 21:1-9). 이러한 므낫세의 죄가 지금 세대의 죄악의 뿌리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 므낫세 뿐이겠습니다. 그의 전과 후에도 그리고 곁에 있는 추종자와 백성들도 모두 그의 탐욕에 물든 우상에 함께 동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만의 잘못이 아니라 부화뇌동한 어리석은 지도자와 백성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습관적으로 오래된 죄악의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나요? 개인적인 면에서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릇 행하며 이기와 욕망을 따라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이 부르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신 것은 우리만 잘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그 뜻 안에는 우리로 말미암아 축복의 통로 되라신 뜻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구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언능 부르시고 구원하신 뜻이 무엇인지 주님께 묻고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들을 기쁨으로 감당해 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의 인도와 통치를 따라서.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주님 말씀앞에 나아가 갈 바를 묻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6-9절 우리의 죄악이 여호와께서 능력의 손으로 세우신 것을 다시 파멸하게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버림받아 절망에 빠진 까닭은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 갔기 때문입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뜻을 돌이키는데 지쳐 이제는 손을 펴서 멸하고, 이 백성이 자기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기에 키를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죽기에 과부가 많아지고, 이러한 이들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며 아무리 복을 받은 이라도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되고 남은 자도 대적의 칼에 붙이실 것입니다. 


모든 재앙의 시작은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죄의 시작이고 결말입니다. 여호와를 버린 것이 죄고, 여호와로부터 떠난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생명도 소망도 삶의 이유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각기 제길로 행하며 불순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전에 여호와의 손 곧 편 손과 팔로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세우셨는데 이제는 그 구원의 손이 심판의 손으로 펴서 멸하고 있습니다. 


과부와 청년들의 어미(8절)와 일곱을 낳은 여인(9절)등 여자와 관련된 세 개의 비유와 키질의 표상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파국적 재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많은 남자들이 죽게 될 것이기에 많은 과부들이 생길 것입니다. 파괴하는 이들이 청년들의 어미를 덮쳐 놀라움과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한 때 일곱을 아들을 낳아 자랑하던 여인이 자식을 모두 잃고 절망과 수치에 떨어집니다. 심판은 키질하듯 철저하게 행해질 것입니다. 키로 까불어 흩어지게 하시고(7절), 그 남은 자들을 다시 대적의 칼에 내맡기실 것입니다(9절). 어느 누구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신 여호와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목숨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 우리의 죄악은 여호와의 긍휼과 사랑과 능력의 손이 심판의 손으로 만나게 합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멀리 떠난 데에서 다시 돌이켜 여호와 앞에 세워주셨는데 어느새 우리가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인지 아니면 다른 길인지 말씀앞에 점검해야 합니다. 너무 멀리가면 우리는 우리의 기준을 욕망에 맞춰서 헛된 길로 빠지고서도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헛된 길에서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택하신 백성으로서 보배로운 소유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 가는 인생이길 원합니다. 



* 기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참사랑 베푸신 우리 주 하나님

주를 외면하고 떠나 각기 제길로 

욕망을 따라갔던 우리의 패역함을 용서하사

다시금 주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자로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에서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길로 행하지 않게 하옵시고

주께서 원하시는 길로 행하기 위하여

각기 제길로 가는 데서 떠나

주님이 가시고 인도하시는 그 길로

온전히 행하게 하옵소서. 

복을 받고도 다 쏟아 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줄 믿고

주의 펴신 팔이 재앙이 아니라

선하신 역사를 이루시는 능력의 손으로 

만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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