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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Oct 15. 2017

예레미야 14:13-22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렘 14:13-22

예레미야 14:13-22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 거짓임을 말씀하시고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도 같은 운명임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심판으로 말미암아 망해가는 유다의 참상을 슬퍼하며 유다의 죄악을 인정하면서도 주의 이름과 언약에 호소하며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13-16절 거짓을 예언한 자들이나 거짓 예언을 받아들인 자들 모두 동일한 심판에 떨어집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은 없으며 평강을 있을 것이라 예언합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보낸 적이 없기에 그것은 거짓 예언이며 그들은 거짓 계시, 점술, 헛된 것,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예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에게 칼과 기근이 임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덧붙여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을 받은 이들도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총체적으로 함께 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과 달리 거짓 예언을 한 이들이 주로 주장한 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상을 빗대어 구원예언자라 칭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이 결코 칼과 기근으로 망하지 않고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거짓 예언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고, 명령도 이르 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것이 없기에 이들의 ‘계시’(이상)는 거짓이며, 전문적 기술에 의존하는 이들의 ‘점술’은 신뢰할 수 없는 예언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이들의 예언은 실체가 없는 ‘헛된 것’입니다. 자주 우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하는 ‘헛된 것’(cf. 사 2:8, 18, 20; 10:10)은 허황된 거짓 예언을 신뢰하는 자들이 결국 ‘헛것’이 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신탁이 아니기에 이들의 말은 ‘자기 마음의 거짓’일 뿐입니다. 이들은 거짓 예언으로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듣는 자들도 미혹시킵니다. 한마디로 구원예언자들은 여호와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칼과 기근으로 멸망하는 것뿐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들의 거짓 예언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자신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이 진실인 줄 알고 따랐는데 이와 같이 심각한 것이라면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선느 이들에게도 동일한 칼과 기근이 있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자들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구원예언자들의 강력한 지지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보다 자신들의 욕망과 기대를 만족시켜주는 구원예언자를 좋아했을 뿐입니다. 참된 복음의 은혜와 책임을 바르게 전하는 예언보다 제의 규정 준수만을 요구하며 값싼 구원을 선포하는 부담감없는 예언자들을 더 좋아한 것입니다. 악과 재앙은 동전이 양면처럼 악을 범하면 재앙은 현실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대한 무지가 죄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의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영적 분별력을 지도자에게 절대 의존하는 오늘의 성도들입니다. 수년을 신앙생활해도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되지 못하고 어릴 적 신앙만으로 살다보니 중요한 문제들에 봉착할 때마다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르는 영적으로 성인아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목회자 절대 의존적 신앙이나,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종교적 제의적 신앙인으로 전락하고 믿음과 행함 또는 삶이 분리되는 신앙인으로 성장을 멈춘 신앙인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게로 잘 양육되어야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맞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들은 변함없이 주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벗삼아 잘 자라가야 합니다. 



17-18절 거짓 예언자와 무지한 백성 모두 기근앞에 무력할 뿐입니다. 

이제 심판으로 말미암아 펼쳐질 참상은 예언자로 하여금 충격 속에 망연자실하게 하여 밤낮으로 눈물흘리게 합니다. 전쟁의 참상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과 사랑과 구별하심 속에 세워진 ‘처녀 딸 내 백성’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파국을 맞은 모습은 예언자로 하여금 충격속에 슬퍼하게 합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 백성을 전쟁을 통해서 심판하셔야 하는 그 마음은 심판의 당하는 당사자들보다 더 고통스런 아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특별한 사랑과 은총속에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전쟁을 통해 진행되었기에 그 참상은 칼과 기근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에 선지자와 제사장들 곧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이들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닙니다. 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모습에 대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학으로는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코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쟁의 참혹한 패배로 이것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망하지 않는다고 평강과 구원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던 자들이기에 그들의 당혹감과 무력감은 더욱 절망적이었던 것입니다. 


욕망과 이기로 뭉쳐진 신앙과 신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현실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보고싶고 믿고싶고 이해하고 싶은 부분만 담고 있는 신학으로는 우리 하나님의 역사와 심판 그로 인한 현실의 신비를 다 이해하고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안일한 신앙, 무지한 신앙, 얕은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을 통한 긍휼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결국 멸망으로 치닫는 내 백성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유기와 침묵을 오해하며 알량한 믿음과 지식으로 경거망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무지하고 앝은 신앙이 거짓 예언에 부화뇌동하며 닥쳐진 심판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져 갈 뿐입니다.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주님 뜻을 모른채...



19-22절 거짓 예언자와 무지한 백성 모두 주를 앙망하는 일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망하게 된 유다의 구원을 위해 간구합니다. 여호와께서 치셨기에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또한 여전히 여호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회복 가능성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과 영광과 언약을 통해 구원을 호소합니다. 헛된 우상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라도 주를 앙망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9-20절은 서술 의문문(화자가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서술로서의 의문문)으로 이해할 경우에 절망적 현실에 대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치료 불가능하도록 유다를 치셨기에 그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정말적인 상태에서 두려움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20절을 수사적 의문문(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진술이나 명령, 감탄의 효과를 내는 간접 화법)으로 이해할 경우 여호와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고 그래서 아직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묵하고 계신 여호와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릴 수 없으니, 시온을 싫어하시지 않으시니, 비록 시쳤지만 다시 고쳐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치료를 고대하니 빨리 개입해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가지 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한 절망적 상황에서 여호와의 처분만 바라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죄를고백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하기에 자신들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하면서 여호와께 범죄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죄악이 심판을 초래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이름과 주의 영광과 세우신 언약에 기초하여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서는 용서받을 만한 것이 없는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했지만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의무에 신실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와를 예루살렘 성전에 현종하시고 언약적 의무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알같은 헛된 우상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없고 하늘 스스로도 비를 내리지 못하고 오직 창조주 여호와만이 결실과 풍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를 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며, 비를 내리게 하시는 창조주의 능력만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이스라엘을 치료해 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큰 파멸과 중한 상처의 징계와 심판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한계와 처지, 그리고 죄악과 우상의 헛됨을 깨닫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고백이 예레미야에 국한된 것인지 총체적인지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이 지향해야 하는 고백과 신앙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탄핵 정국후의 판결 과정들은 곧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저항하고 있는 당사자들과, 그런 이들에 부역하며 동조하고 있는 추종자들 모두 참으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얼마나 지은 죄가 많은지 다시 구속기간이 연장 되었습니다. 급기야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오는 범죄는 엮이고 엮인 것들이 드러나면서 이전 정부의 문제들까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들이 우리 교회의 단면들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하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지도자들과, 잘못된 메시지에 동조하여 그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함께 동조 부역하는 성도들이 부패와 멸망의 길로 치닫는 줄도 모르면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병든 교회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메시지 속에 한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다만 아직 파멸과 중한 상처가 드러나지 않고 전조현상만 보여 지기에(어쩌면 암처럼 이미 수술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헛된 우상과 왜곡된 복음과 무지하고 알량한 우리의 신앙에서 속히 바르게 일어날 수 있길 원하며 주님을 앙망하나이다. 



* 기도

우리에게 주의 이름을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세우시고

영원한 언약을 허락해주신 하나님 아버지

거짓된 평강 예언을 하는 것에 혹하여

여호와의 뜻을 외면하고

우리의 이기를 따라 말씀을 곡해하여

묵상하고 전했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마음의 거짓으로 설교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인양

기만했던 죄악들에 대하여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여 주셔서

징계의 채찍을 통해서라도 돌이키길 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깨어나

우리 주님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악과 죄악을 깨달으며

허락하신 주의 이름과 영광을 바르게 알고

주께서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여

신실하신 주님이 자녀답게 살게하옵소서. 

헛된 우상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오직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우리 주만 앙망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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