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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Oct 15. 2017

예레미야 14:01-12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렘 14:01-12

예레미야 14:01-12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여호와를 떠나 고통당하는 상황을 가뭄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력한 자들도 밭 가는 자도 들집승도 식물도 물이 없어 괴로워합니다. 이 아픔을 본 예레미야는 중보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해도 듣지 않고 정하신 벌을 내리실 것을 천명하십니다. 


1-6절 여호와를 버리고 떠남의 결말은 기갈과 절망 뿐입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떠난 이스라엘의 상태를 가뭄과 기갈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은 피곤하여 애통하며 부르짖음이 커집니다. 귀족들이 돈이 있어도 물을 얻지 못해 절망하고, 농사하는 자도 물이 없어 절망하며, 들짐승이 풀이 없으므로 새끼를 버리고 헐떡이며 눈이 흐려집니다. 


물은 혼동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상징도 됩니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 다른 물을 찾고 다른 근원을 섬기며 다른 길로 행한 이스라엘의 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없는 가뭄과 기근의 상황과 유사해 집니다. 알량한 힘과 지식과 권세로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가뭄앞에 속수무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귀족들(귀인)은 종들을 보내서 물을 구하려 하지만 구할 수 없기에 절망합니다.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린다’는 표현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밭을 가는 자 즉 농사하는 자에게도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내려지지 않는다면 역시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가 아닌 바알이 자신들의 농사에 풍요를 줄 것으로 생각했고, 비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당연히 올 줄 알았지만 이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여호와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당장 가뭄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기대한 우상은 무능, 무응답, 무책임할 뿐이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들짐승들이 자기 하나 목숨 부지하는 것도 어려우니 본능적으로 살려야 할 새끼도 버리고 헐떡이며 눈이 흐려지게 됩니다.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거늘 이를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며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먹이고 양육할 수 있다는 교만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천지만물의 운행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가 헛될 뿐입니다. 우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과 권세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병들고 자연재해가 닥치게 되면 인간은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 수 있다는 교만과 배반의 결말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떠났기에 기력이 쇠하여 기갈의 상태에 빠지고, 살아갈 이유와 더 나아지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런 소망을 품을 수 없는 절망에 있거든, 역시 다시 사는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7-9절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의 유기(遺棄)입니다. 

절망 속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향하여 간구합니다. 먼저 우리의 죄악과 타락함과 범죄함이 분명하지만 주의 이름을 위해 일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소망이되시고 구원자이시기에 우리를 거류하는 자와 나그네처럼 대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놀란 자처럼 급기야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처럼 응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이니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절망적 상황을 간과하지 않고 동일 운명체로 생각하며 중보하며 간구합니다. 유다의 죄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7절). 또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확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고난 당할 때에 구원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깨어질 것 같은 절망적 상황이 지속되고 마치 자신들이 걸하고 나그네와 같은 상황에 유기되어 있으니 다시 응답해 주시라는 간구를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응답하시지 않지만 여전히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임을 고백하면서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과 타락과 범죄함이 많은 유다는 기도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까지 빠졌지만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소망을 품고 중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상태를 말씀앞에서 진단하는 일과,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바르다면 여호와의 침묵 속에서도 여호와를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의 유기이지만 아직 기도할 수 있다면 소망은 남은 것입니다. 아직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니 유기(遺棄)의 상황에서도 주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임을 믿습니다. 



10-12절 절망(絶望)은 문자 그대로 모든 소망(또는 절망;切望))이 끊어지는 것이며 멸망을 말합니다. 

유다 백성은 바른 길이 아닌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여호와를 배반하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죄를 벌하시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여호와의 인내의 끝에서,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되면 그 때는 더이상 금식하며 부르짖고 제물을 드리며 복을 구한다 할지라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계획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거룩한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길을 멀리하고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로 행한 것입니다. 그 길로 행하면서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죄악으로 치달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래참으심을 착각하여 죄악을 멈추지 않고 행한 것입니다. 마침내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이제 유다 백성을 벌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금식과 기도와 번제를 드린다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더이상 듣고 받지 않으실 것이며 칼과 기근과 전염병 곧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치는 전쟁을 통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절망(絶望)은 모든 소망과 희망과 갈망이 사라진 절망(切望)이며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랑하며 달려가고 있는 길의 방향과 내용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인도하시는 길인가요?



* 기도

생수의 근원 되시며 

우리의 소망되시며 고난 가운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악과 타락함과 범죄함

어그러진 길로 행한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속히 이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참된 소망되시는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절망이 더 깊어 지기 전에

우리가 가는 길의 결국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주께만 소망을 두는 인생이게 하옵소서

주님의 침묵이 용서가 아니라 때로 분노이며

심각한 유기의 상황이 지속될 수도 있음을 알고

겸손히 주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공동체의 예배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주께 열납되는

온전한 예배의 삶 살게 하옵소서.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부끄럽지 않게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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