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2-22
마태복음 21:12-22 성전과 무화과나무의 심판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예수님은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 쫓으시면서 원래 기능을 상실한 성전은 심판하십니다. 다시 성으로 오시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시면서 성전과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하시며 다시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 회복될 성전을 예고하십니다.
# 12-13절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환전상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시면서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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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보입니다. 당대 성전세를 두로 동전으로 내도록 했기에 부득이 성전을 찾는 이들은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멀리서 제물을 가져온 이들에게 제사장들의 검열에 흠없는 제물을 준비하는 일이 성전 앞에 있는 이들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했기에 이를 파는 이들이 성전 뜰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환전과 제물의 매매를 담당하는 이들이 부당이득을 취하거나 여러가지 횡포도 문제였지만 이를 눈감아주고 또한 이들과 결탁한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과의 관계가 더 심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 이러한 관계는 멀리서 성전을 찾아온 이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고, 이를 악용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종교심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탁욕을 채우고 치부를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서 정작 성전 본연의 기능은 변질 왜곡 부패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치유하고 품지 않고 제한하며 차별하고,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과 찬미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곳은 더이상 성전으로서의 기능과 존재 이유에 대해 한계를 드러낸 모습입니다. 결국 백성들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치부를 위한 공간으로 쓰면서 겉으로는 화려한 제의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수단으로 전락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대 강도는 명분상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우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유대인들을 약탈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명분상으로는 성전을 위해 세금을 걷고 제의를 위해 제물의 매매를 허용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전세를 상징하는 환전상, 가난한 이들의 제물을 상징하는 비둘기, 이러한 일들을 하는 상과 의자를 둘러 엎는 것은 결국 단순한 성전의 정화와 청결이 아니라 척결내지 심판을 상징하는 행동입니다. 더불어 환전과 제물에 대한 부분만 문제가 아니라 이는 성전이 총체적으로 그 기능을 상실했고 이를 심판하는 행위로 봐야 합니다. 이미 오래 전 하나님의 영광은 떠난 이가봇 성전이었고 강도의 소굴로 변한 성전이 여전히 본질을 망각하고 오히려 예배자들을 착취하고 부정한 축재와 거래가 오가는 상황은 성전보다 더 크신 주님이 이를 척결하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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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단지 교회 안에서 어떤 상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와 종교를 탐욕의 수단으로 삼고,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사교단체 정도로 생각하며,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하고 번영과 치부를 위해 성도들을 이용해 탐욕을 채우면서 상부상조하는 모습으로 전락한 공동체라면 이는 척결과 심판을 피할 수 없기에 교회(주님의 몸된 교회,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 본연의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도화된 종교와 종교인들은 넉넉한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특권에 길들여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질을 포기하게 됩니다.
목회와 교회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주님은 증인이 되라 하셨고 바울은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으로 세우는 일이라 했습니다. 이는 전도를 통해서 단순히 교회의 세를 불리고 모아진 자원과 힘을 가지고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구제를 잘하는 그런 공동체를 세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심판받는 성전이나 16세기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당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잘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훈련하고 양성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런 성도가 모인 곳이 진정으로 주님이 꿈꾸시고 교회이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거룩한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제의가 있는 곳이지만 세상에서 제대로 살지 않고 죄악이 관영할 수록 오히려 제의는 더 화려해지고 복잡해 집니다. 이를 주관하는 제사장들의 타락과 헛된 권위주의는 자연적으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합당한 예배여야 한다면 결국 제의는 삶의 예배가 기반이 된 고백이 담겨야 주님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이렇게 살게하신 복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개인과 삶의 자리에 몸으로 드려진 삶의 예배를 담아내고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려진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다시금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이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고 하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하고 그 믿음의 능력으로 응답된 길을 따라 매일매일 거룩한 성전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성전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배당과 성전, 교회와 성도에 대한 개념들을 바르게 정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듯 합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배당을 성전이라 생각하고 있고, 성도의 모임이 교회인데 이를 유형적인 건물로서의 예배당만을 교회로 강조하고, 교회 본연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서는 그저 세를 불리고 힘을 키우고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있으면 마치 자신이 믿음이 좋은 성도로, 큰 믿음 가진 이로 착각하고, 더 나아가 좋은 설교를 하고 좋은 설교를 들으면 마치 자신이 그런 거룩한 사람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 우리의 신앙의 개념과 정의를 바르게 세워가지 않는다면 지금 주님이 엎는 이 심판 앞에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 14-19절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나아오자 고쳐주십니다. 또 이를 본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한 행동을 이상한 일이라 단정하고 찬미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어린아이들이 오히려 제대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그들을 떠나 성 밖 베다니로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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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맹인과 저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전은 이렇게 죄로 인해 불완전한 이들을 고치고 온전케 해서 하나님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그동안 성전에 있었으나 고침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것은 앞서 성전이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증입니다. 더더욱 앞을 보지 못하고 다리를 저는 것과 같이 지금 성전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잘못 운영되고 있는 것을 또한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성전의 한계를 극복하시며 본연의 역할을 실행하고 계신 것을 통해 당신이 참된 성전인 것과 역할을 망각한 성전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미합니다. 앞서 11:25에서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찬미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하나님을 잘 알고 믿고 있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악이, 그리고 탐욕에 물들고 타락한 이들은 이 그 눈이 가려져 정작 눈으로 메시아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깨닫는 이들을 향해 자신들의 권력을 가지고 잠잠하라하고 배척하고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의 찬미를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하실 것임을 다시한번 확신하고 계십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상한 일이라 폄하하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찬미하는 아이들을 향하여 분노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신학 그리고 신념이 왜곡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행동입니다. 지금 성전 건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지도자들과 사람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성전 건물도 헤롯의 탐욕에 의한 산물이며 이가봇이기에 후일(AD 70년)에 이도 무너지지만 지금은 종교지도자들과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타락한 종교와 종교인을 향한 심판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의 주인되시는 주님이 그들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 할 쉐키나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 성전이 된 것을 주님이 떠나 성 밖으로 가서 거기 유하시는 모습으로 마태는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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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도 우리 주님을 믿는 성도요, 주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요,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정작 주님이 가신 길과 그 뜻과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영적 소경인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주님을 고백하지 못하고 왜곡된 전통과 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서지 말아야 할 곳에 서 있고, 가지 말아야 할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가봇 성전인줄도 모르고 의례히 하건 관행과 타성에 젖어서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님은 어디쯤 계실까요? 우리 삶의 중심과 우선순위에 있는지 아니면 한참 못미치는 곳에 있는지,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나와 탐욕의 산물인 하나님 아닌 우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날마다 봐야 보고 살아가야 할 거슬 제대로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그저 그렇게 끌려가듯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이 길에서 돌이켜 온전히 주를 바라보며 주님을 따르길 원합니다.
# 18-19절 성전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를 맺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으로 들어가실 때에 시장하셔서 길 가의 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갔지만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나무였습니다. 이에 나무를 저주하여 영원토록 열매 맺지 못할 것을 명하시자 곧 나무라 마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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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대한 심판은 결국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성전 심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구약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 사용되는 나무입니다(사 28:3-4; 렘 8:13; 욜 1:7,12; 미 7:1-6 등). 무화과나무는 단어상으로는 꽃이 없는 나무이지 열매가 없는 나무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무화과는 잎이 나오기 전부터 열매가 먼서 생기고(이는 파게라고 합니다), 잎이 나온 후에는 더 커서 서너번 더 열매가 있어서(이는 트아니라고 합니다) 항상 그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시장하셔서 한 무화과나무에 가셨는데 항상 있어야 할 파게든 트아니든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앞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이스라엘에 정작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맺어야 할 열매는 결국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일차적으로 바른 믿음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뜻을 따라 보배로운 소유로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바르게 갖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앞서 성전을 통해서 총체적으로 타락하고 변질되고 왜곡되었으며 제 역할을 커녕 본연의 정체성도 잃어버렸기에 정작 언제나 있어야 할 그 열매가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모든 무화과나무가 꽃이없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저주로 봐서는 안됩니다. 무화과나무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하시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앞서 성전이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잃고 탐욕과 이기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들이 결국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같이 이스라엘이 파멸과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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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앞서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1).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따라 열매 맺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제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성전을 척결하고 참 성전(예수님)을 회복하시고 새 성전(교회)을 세우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된 우리에게도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드리는 합당한 몸 곧 삶의 예배가 열매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주님이 동일하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라고 알고 있다면 이 말씀 앞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 20-22절 성전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무화과를 저주한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도 이상하게 여기면서 어떻게 된 것인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너희도 이런 일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때 무엇이든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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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5절에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보시면서 이상한 일이라 여겼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화과를 저주하자 말라버린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아직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따르고 있지 못하고 눈이 어둡고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믿음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치료하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서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런 일 뿐 아니라 산더러 들려 바다에 전져지라 해도 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산을 바다에 던지는 기적은 앞선 성전 심판과 무화과 심판에 이어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단순한 기도의 능력을 말한다기 보다는 산을 바다에 던져지는 것도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당하는 모습을 연상케 해줍니다. 그렇다면 이 산은 일반적인 산이 아니라 거룩한 성이 있는 산 성전 산 곧 예루살렘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심판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9:28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이후에 성전이 멸망하는 것들을 목도하게 될 것을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살면 보게 될 것을 말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한 구절만 보면 불가능한 일도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가능해진다는 단순한 기도의 능력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17:20에서는 겨자씨 믿음만 있어도 가능하다 했는데 거기서도 단순한 기도만이 아니라 사람을 얻고 회복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을 다 포함하는 믿음의 행위를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성전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실제적으로 이루어 지는 데 동참하게 되고 더 나아가 22절에서 기도하면 다 받는다는 것은 제자들이 새로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동참하여서 하나님의 집이 기도하는 집 곧 하나님과 바르게 소통하는 곳으로서의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되찾게 되는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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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향하여 저주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다 이루시겠다는 교훈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혹여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서 무리들과 더불어 자신들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나 이에 부역하는 세력들을 향해 이 능력이 유효할 것 같은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지만 본문은 그런 부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기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부분에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 성전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고 그 일이 이제 때가 되어 실현될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일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옛 성전은 기도하는 집 곧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소통하며 따르게 하는 기능을 상실하여 파괴될 것이지만(심판) 이제 예수님 당신을 통해 참성전을 회복하고 제자들은 새로운 성전으로 세워져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응답되어지는 관계로 회복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때 마침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구하는 기도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령이 거하시는 새로운 성전된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재건된 교회인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세우시려고 했던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우리를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
택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성전 본연의 기능들을 망각하고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살고 있는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배당 안에서만 성도요
세상에서는 강도와 같은 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어린아이도 보고 깨닫는 주님을
여전히 바로 알고 믿지 못하고 있음도 고백합니다.
이가봇 성전이 아니라 쉐키나 성전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그 뜻에 순종하며 열매 맺는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 되길 원합니다.
주께서 새롭게 하심을 따라
날마다 믿음으로 주께 나아가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열매 맺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 주님과 소통하며
주의 뜻 품어 주께 인도할 수 있는
거룩한 성전,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