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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Mar 31. 2019

마태복음 22:15-22 논쟁1_누가 진짜 왕인가?

마태복음 22:15-22 

마태복음 22:15-22 논쟁1_누가 진짜 왕인가?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로(21:28-22:14 두 아들, 포도원 집 주인, 왕의 혼인잔치)로 하신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수치를 안겨주기 위해 세 가지 난제들(세금, 부활, 큰 계명)을 던집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오히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권위는 더 분명해집니다. 첫번째로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들과 함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인 적법한가(로마법이 아닌 율법에 비춰서) 그렇지 않은가를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 15-16절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구별된 존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결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서 속에도 없는 말로 예수님께 접근합니다. 

*

이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향하여 적대적이며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고심합니다. 우선은 고상한척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난제 혹은 딜레마를 예수님께 던져서 예수님 스스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는 계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략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들과 상반된 견해를 가진 헤롯당원들과의 협력도 불사합니다. 항상 악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꺼이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에 내는 세금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은 이에 동이하는 것은 결국 로마 황제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일이기에 율법에도 어긋나고 자신들의 신앙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헤롯 당원들은 로마로부터 받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에 내는 세금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세금에 대한 문제는 신앙과 정치적인 이해타산이 극명하게 갈리는 민감한 문제였기에 어떤 자세를 취하든 로마정부와 율법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직접 가지도 않고 제자들을 헤롯당원과 함께 보냅니다. 이는 딜레마같은 이 문제에 어떻게든 연루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과 정의는 문자적으로는 예수님의 성품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하지만 자신들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꺼리는 일이 없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반드시 답해 달라고 다분히 의도적인 뉘앙스의 표현입니다. 덧붙여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기에 자신들의 그동안의 평가와 비난이 있지만 기꺼이 질문에 답해 주실 바라는 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너무도 뻔히 보이는 의도를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것은 이들의 감언이설과 미혹에 동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를 분명히 아심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오히려 진실을 밝히시므로 말미암아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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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역사 이래로 항상 하나님나라 백성이면서 동시에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로 사는 구조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로 이중국적을 가진 이들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는 때로 모순되는 일이나 딜레마같은 문제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보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공존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반되는 딜레마를 이기적으로 악용하는 이들이 문제입니다. 주로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이러한 딜레마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백성은 두려움 속에 속아 살도록 합니다. 작금의 우리 한국 현대사에서 북한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미국등에 대한 이해관계는 권력집단이 늘 이용하던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참으로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악인들의 선동을 분별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부화뇌동하며 이합집산과 정죄로 자신들도 모르게 악에 동조하는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부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의 이중국적을 가진 존재로서 어떻게 구별된 성도로 온전케 살아갈 수 있는지 예수님을 통해서 잘 배울 수 있길 빕니다. 


# 17-19절 우리는 악함과 외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결국 본색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생각을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질문의 요지는 결국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여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을 아시고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 자신을 시험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답변을 위해서 세금으로 내는 돈을 자신에게 보이라 하니 이들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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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로마의 화폐에 쓰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신의 아들”이라는 문구때문에 유일신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은 꺼리고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로마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서 일상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유대인들 자체적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에 내는 인두세 곧 세금은 로마화폐로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평소에 이 로마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면 결국 그 안에 적힌 문구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로마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 이외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지금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를 질문하시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그 동전에 바로 위의 문구가 써 있었던 것입니다. 

세금의 문제는 찬성하면 유대인들에게 신성모독과 매국노라는 비판과 더불어 그동안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을 피할 수 없었고, 반대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과 체제 위협 세력이라고 고발되거나 체포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답변을 하든 그 사람은 로마와 유대 사이에서 결국 적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딜레마이며 난제에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들도 모르게 데나리온 하나를 내어 놓습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터라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유대화폐를 따로 사용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되 로마 화폐는 따로 사용하고 특별히 세금을 낼 때만 쓰이는데 지금 제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겉으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안으로는 버젓이 이런 화폐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모습을 악하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외식ㅎ나다고 곧 위선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되묻습니다. 악은 늘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서 시험하는 무리들입니다. 

*

위선은 겉으로는 선한척 율법을 지키는 척 하지만 실상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악과 위선을 가리기 위해서 오히려 역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겉으로는 고상한척 거룩한척 하지만 결국엔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위선과 외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과 위선을 버리고 겉과 속이 같은, 외면과 내면이 같은,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 20-22절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내민 데나리온에 부조된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인지 되묻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는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기며 예수를 떠나갑니다. 

*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라 한 것이 로마의 조세 정책에 대한 찬반을 말하는 것은 이 대화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로마 체제의 전복을 꾀하신 것도 아니고 이후 바울 사도도 로마정권에 대한 전복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오히려 질서 유지와 복음 전파를 이유로 이들의 순기능을 통해 기도하라는 권면까지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더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담긴 화폐가 가이사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가이사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인간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면서 선언입니다. 곧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것은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유대인들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이 땅의 진정한 주인 곧 왕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곧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담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장의 표면적인 의미로서는 세금과 신앙사이에서 지혜롭게 처신하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결국 가이사가 신의 아들로서 주인인 것 같은 세상과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참된 주이이시며 왕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져서도 그렇고 어쩌면 하나님을 진짜 왕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가이사를 더 두려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읽어낼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 누군가에게 거룩한 책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삶을 말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가 드릴 예배입니다. 역시 거룩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권위를 가지신 우리 주님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우리의 잘못된 탐욕을 정당화 하고, 위선을 가리기 위해 주님을 시험하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고 온전히 주의 통치에 순종하기를 힘쓰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모든 만물의 주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왜곡된 전통과 탐욕을 위해

이합집산과 악에 동조한 이력들을 낱낱이 고백합니다. 

참되시고 진리의 도를 따라 인도하시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품은 거룩한 백성으로

말과 생각과 행실이 일치된 온전한 자로 살기 원합니다. 

위선과 외식적인 언행을 돌아보면서

사람의 눈을 가리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에 대해서

또한 자유롭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몸에 흔적으로 새기고

날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이 받으실 만한

합당한 산제사로 드릴 수 있길 원합니다. 

주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심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고백하고 신앙하며 살아가는

그 믿음 더욱 굳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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