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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Apr 01. 2019

마태복음 22:23-33 논쟁2_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마태복음 22:23-33

마태복음 22:23-33 논쟁2_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리새인들의 세금 논쟁에 이어서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이들은 수혼제도를 통해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해 오해한 것임을 밝히시고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기에 부활이 있음을 증명하십니다. 


# 23-28절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율법의 바른 취지도 모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모세의 율법에 정한 수혼제도를 들어 극단적인 가정을 제시하면서 부활이 만일 있다면 이렇게 한 여자가 여러 형제와 상속자를 얻기 위해 함께 했다면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

우선 사두개인들은 사독의 후예로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데 있어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부활의 근거 구절들로 간주하였던 이사야 26:19이나 다니 엘 12:2에 나타난 부활 사상이 후대에 모세의 입장을 왜곡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바리새인들과도 부활에 대해 이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모세오경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안에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를 든 수혼제도 또는 계대 결혼법은 여자가 자녀를 낳지 못한 상태 속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까운 친족 중에서 그녀를 아내로 취하여 대를 이어주는 제도로서, 이 제도는 한 집안에 대가 끊어지는 것을 막고, 각 가정에 분배된 기업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어디까지는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모세를 통해서 제정하신 이유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기업을 지키고 과부를 지키고 연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취지를 무시하고 이러한 결혼 제도대로 만일 부활한다면 그 때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무지와 지식의 한계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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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택한 백성들의 세상과 구별하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며 함께 서로를 도와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상과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담아 사랑의 공동체로 서로위로하며 격려하며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서로도우며 사랑하며 함께 세워져 가길 원하시는 최소한의 제도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른다면 얼마든지 법에 대해서 오해하고 악용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우리가 헤아리지 못한채로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취지에 대해서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더욱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 29-30절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부활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짧게 대답합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해서 오해한 것이라고. 부활 때는 결혼이 필요없이 하늘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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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이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부활의 주님이시기에 확신가운데 제시한 말씀에 자신들의 무지와 한계를 절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 성경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결국 오해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지식의 한계에 갇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기 보다 인간들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또한 그 바탕에서 자신들의 교리를 세워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부활 때에는 더 이상 천사들처럼 결혼이 필요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들과 같다는 표현은 결혼이 필요없는 것에 한해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부활 때에는 더이상 죽음이 없이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에 때문에 결혼을 통한 생산이나 번성이 필요가 없기에 결혼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삶에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와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부분이 있습니다. 부부의 관계가 어떤 관계로 지속될 것인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의 삶은 이 땅 그 어느 관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로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이기에 현세적인 관계나 이해로 추정하는 삶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이 있을 것으로 상상할 뿐이지 더이상 우리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뿐 억측과 우리 지성의 한계 안에서 자꾸 논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입니다. 

*

하나님나라나와 부활 그리고 내세의 삶에 대한 이해의 근거들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지만 우리가 읽고 해석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계시하고 깨닫게 해주시는 데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크신 하나님의 뜻을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아는 일에 있어서 늘 겸손히 임하여 주님이 계시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을 알뿐이라고 고백하면서 내가 아는 것을 절대시하거나 그 기준으로 타인을 정죄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은 어리석은 자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개인적 체험에 대해서도 그것이 마치 전부인양 하나님의 능력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은 우리가 아는것보다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더더욱 우리 현세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 마저도 우리는 다 알지 못하고 우리 눈으로 보고 듣고 읽고 있는 것마저도 그 이면과 내면의 일들 모두 완벽하게 안다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세상과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히 임해야 합니다. 


# 31-33절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산 자의 하나님도 모릅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사두개인들이 모세오경은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모세오경의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확증해 주십니다. 이에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

모세오경에 부활에 대한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음을 근거를 들어 반박하십니다.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은 출애굽기 3:6말씀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었다”라는 과거형이 아니라 “하나님이요”라는 현재형을  쓰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고, 모세를 향하여 이들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계속적으로 약속을 이어가시는 것은 만일 약속이라는 것이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라면 이미 이들이 죽었다면 더이상 이스라엘에게 땅에 대한 약속 기업에 대한 약속은 효력이 없을 터인데 여전히 지금까지도 유력하다면 부활을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에 대한 역사성과 지속성 그리고 이후로 부활의 첫열매도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오래도록 논쟁하고 있는 부활에 대해 명쾌한 설명에 무리들이 듣고 그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사두개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한 것이 들통나서 수치를 당하고, 예수님은 다시금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아시는 분으로 더욱 그 명예가 높여 졌습니다. 논쟁이 진행될 수록 수치를 안기려던 이들은 오히려 수치를 당하고 오히려 예수님은 더욱 그 권위가 높여 지고 있습니다. 

*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오늘만 사는 것처럼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위와 기득권 위에 안주하다 결국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고 자신들의 지식의 한계에 갇혀서 결국 메시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하며, 자신들의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 앞에서 제사장의 역할도 제대로 못한 것이며, 그들의 잘 알고 있는 성경이 증거하는 주님이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의 삶의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이요, 이 땅에서의 책임있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요,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이요, 지금 여기서의 삶을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며 오늘도 주님의 권위와 인도 아래 주의 뜻 이뤄가는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따르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용기있는 믿음을 구합니다. 


# 기도

산 자의 하나님

우리에게 부활의 산 소망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미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부활을 경험하여 새백성으로 살게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의 말씀을 알아가는 일과

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일에

바른 믿음과 바른 신학과 바른 삶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나의 앎의 한계를 인정하고

날마다 겸손히 주의 말씀앞에 나아가길 원하오며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주님 뜻 바르게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약속이 계속됨에 따라

이 땅에서의 삶의 모든 것들이

결국 주님 앞에 설 날이 있음을 기억하며

연속성과 비연속성 사이에서

무의미한 상상과 두려움과 억측으로

부활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어리석음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의 곤고한 삶으로 

부활의 산소망을 간절히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 위로로 채워 회복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의 가르침 앞에 순종으로 반응하길 원하오며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겸손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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