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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Apr 02. 2019

마태복음 22:34-46 논쟁3_큰 계명과 그리스도

마태복음 22:34-46

마태복음 22:34-46 논쟁3_큰 계명과 그리스도


세금 논쟁과 부활 논쟁에서 수치를 당한 이후 바리새인들은 다시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율법사를 통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변하십니다. 곧이어 이제는 예수님이 논쟁의 불씨가 되었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의미를 교정해 주시며 논쟁을 마무리합니다. 


# 34-40절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시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세금 논쟁에서 수치를 당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마저도 논쟁에서 수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시 고민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할 꺼리를 찾습니다. 이번에는 율법사를 통해서 613개나 되는 율법 중에서 어느 것이 큰가에 대한 난제를 제시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같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바리새인들이 율법사를 통해 제기한 ‘큰 계명’논쟁은 그들 스스로 논쟁거리가 되었던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일 모두가 다 똑같다라고 해도 그리고 어느 것 하나를 크다라고 말씀하셔도 이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난제로 여겨서 그들은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율법을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분에게 이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갇혀서 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예수님께서도 올무에 걸릴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 질문은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답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이 표현은 인간의 구성요소가 세가지가 아니라 전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인간 구성을 삼분설로 나눠서 각각에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즉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도 이와 같은 동등하게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시고 이 두 계명이 결국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보통은 십계명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면 다른 모든 계명들은 버려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계명의 근거와 의미와 강령은 결국 사랑에 기인하고 사랑으로 행해야하고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계명도 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제정된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실천되고 그 방법에 있어서도 사랑의 통치를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도 마찬가지 그런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모든 계명들을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기인하여 해석하고 실천하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도 동일한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이 두 계명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눌 수 없습니다. 둘 중에 어느것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것은 참 사랑 아닙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상호 의존적이며 보완적인 동등한 계명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결국 사람 사랑으로 이어디기에 하나님 사랑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으로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계명을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하는 율법사들이 지금 하는 행태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진정 계명을 아는 자들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계명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정죄하는 일은 설령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을 향하여 계명을 근거로 정죄하고 비난하는 일은 잘못된 일입니다. 더군다나 계명에서 약속하고 말씀하신 뜻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시험하고 불신하는 일은 이들이 결국 계명을 자 모른다고 할 수 있고, 혹시 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전통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고착되어버린 결과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율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시험했으며, 이웃을 사랑해야 할 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성경을 안다 하면서 정작 그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거나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제대로 된 열매가 없는 삶을 산다면 그는 결국 성경을 제대로 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앎은 언행심사가 일치될 때 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율법사들처럼 계명의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에서의 언행심사는 온전한 앎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살아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학적 논의와 고백은 무의미하고 공허할 뿐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그리고 율법사는 지금 계명을 살아내는 일에 부족했으며 이는 계명에 대한 바른 이해의 부재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오해한 것 때문입니다. 역시나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는 이토록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우리 삶 전반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 앞에 서는 일과 그 말씀을 바르게 읽어가고 또 그 말씀을 살아내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 더온전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 41-46절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주(主)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번엔 바리새인들의 모임에서 예수님이 질문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누구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시편 110: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들이 그토록 문제 삼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의미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들이 생각한 다윗의 자손과 원래의 의미 사이의 모순과 오해를 드러내고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

예루살렘 입성 때부터 지금까지 결국 예수님을 향하여 논쟁이 시작되게 된 근본 요인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데서부터입니다. 그동안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계속 증거해 왔는데 최종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란 개념을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율법학자가 이해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개념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을 계속 시험하면서 넘어뜨리려 하고 있었을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이들이 기다린 다윗의 후손은 메시아가 맞는데 정치적 메시아 즉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하고 다윗 시대의 영화로운 나라로 회복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윗의 후손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것을 이들이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들의 이해한 것에 한계가 있기에 지금 교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는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인지 묻고, 둘째로는 왜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고 부르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주라고 불렀다면 후손으로 오신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성령에 감동되어(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단순히 정치적 독립을 가져오는 민족적 메시아로만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을 인정하시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다윗의 주가 되시는 분으로서 유대인들의 이해로는 부족하고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만의 왕이 아니라 온 땅과 하늘의 주가 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잘못은 아닌데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담아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이제 이후로 마태복음에서는 더이상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의 본질에 대한 호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다윗의 후계자나 다윗과 꼭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지상의 왕권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권위를 가진 다윗의 주(Lord)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슨 대답을 이끌어내고 계신지는 분명했지만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결국 21:23부터 시작된 일련의 논쟁에서 주도권을 잡은 쪽은 예수님이셨습니다. 무리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리고 더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며 다윗의 주이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중보자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곧 우리가 충성하고 순종해야 할 왕이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확신 함으로써 땅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적 용어들에 대한 개념정리가 차믕로 중요합니다. 의례히 잘 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간다고 착각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성경, 내가 지금 알고 고백하는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내용들은 과연 주님의 말씀에 합한 것인지, 알기만하고 제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얼마나 게으른지, 참으로 주님을 그리스도로 온전히 믿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 하시며

사랑으로 우리가 살도록 택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을 바르게 알고 깨닫게 하여주시고

앎이 삶과 일치되는 온전한 앎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 제게 있는 신앙의 개념들이

주의 말씀으로 다시금 바르게 정립될 수 있도록

지혜와 명철과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허락하옵시며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의 계명

곧 사랑하라신 뜻 이루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능력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서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까지 넉넉하게 사랑할 

힘과 능력과 졔로 그리고 공감케 하는 은혜도 주옵소서. 

그리스도 되신 주님의 인도에

늘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고

말씀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며 적용하는

천국을 사는 신실한 성도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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