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09:01-12
요한계시록 09:01-12 악의 세계에 대한 재앙 - 일곱 나팔 2
네번째 나팔 이후에 땅에 사는 자들(불신자)에게 임할 세 가지 화가 남아 있다고 한 그 화가 시작됩니다(앞선 네 개의 심판보다 무섭습니다). 다섯번째 나팔을 분 이후에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여니 황충이 올라와서 전갈의 권세를 받아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하나 죽이진 못하게 합니다. 이 황충의 모양은 메뚜기같이 기괴하고 그들의 왕의 이름은 아바돈(히브리어)과 아볼루온(헬라어, 파괴자, 사탄)입니다.
# 처음 네 나팔의 심판은 자연계에 대한 심판, 다섯째 여섯째 나팔 심판은 인간 자체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황충은 요엘 1-2장과 출애굽에서 여덟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메뚜기가 계시록에서는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로 상징되고 이들이 불신자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로서 악령이나 더러운 영으로도 표현됩니다. 이 귀신은 사탄이 천 년동안 결박되어 있는 곳이며 적그리스도와 귀신들이 갇힌 곳인 무저갱에서 올라옵니다. 메뚜기는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5-8월 건기 동안 주로 생존합니다. 그래서 5개월 동안이란 기간이 나왔고, 귀신은 군대처럼 올라와 일정한 기간동안만 불신자를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 1-3절 하나님은 심판하는 존재들에게 전갈의 권세를 잠시 허락합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천사 곧 타락한 천사 곧 사탄으로 쫓겨난 별이나 유리된 별로도 표현됨 - 유다서 13절)하나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문을 여니 연기가 올라와 해와 공기가 어두워집니다. 그 가운데 황충(메뚜기 일종)이 땅 위로 와서 전갈 같은 권세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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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20절에서 별은 사자 또는 천사를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은 그래서 타락한 천사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여 무저갱에 갇히게 된 사탄입니다.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무저갱의 열쇠를 곧 통치할 권세를 타락한 천사에게 허락하자 곧바로 무저갱의 문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타락한 귀신들을 동원합니다. 타락한 천사 곧 마귀은 계속 하나님을 흉내내며 하나님께서 교회의 사자들을 다스리는 것처럼 귀신들을 동원합니다. 황충(메뚜기의 일종)으로 표현되는 귀신들은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 곧 전갈이 사람을 쏠 때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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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 재앙은 땅에 속한 자 곧 불신 자들에 대한 심판이면서 경고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여지를 남겨 두면서 경고하지만 도리어 사람들의 마음이 더 강퍅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다섯번째 나팔 부터는 그 화가 더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열 재앙 때에도 점점 재앙이 더해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되었지만 바로왕은 더 강퍅해져 갑니다. 이들의 배후에는 마귀와 악한 천사들이 있었다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런 배경을 갖고 마귀와 악한 존재인 귀신들의 권세와 출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그리스도의 권세와 통제 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4-6절 하나님은 심판하는 존재들을 통제하며 사람을 죽일 권세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황충들에게 풀이나 수목 말고 이바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 해하고 죽이진 못하게 합니다. 또한 그 기간도 5개월로 국한합니다. 이들이 사람을 괴롭혀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고 고통이 그들을 괴롭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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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들은 풀이나 푸른 것이나 수목을 먹어야 하는데 이것을 먹지 못하게 하니 이들은 굶주림에 먹을 것을 찾아 더 극성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 곧 불신자들을 먹이로 삼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고 살아갈 때 이 사탄과 귀신들은 오히려 그들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고통은 줄 수 있지만 생명을 해하지는 못하게 합니다. 생명에 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충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만(5개월은 제한된 기간을 의미합니다) 활동할 수 있습니다. 심판의 권세가 더해질 수록 하나님은 인친 백성을 보호하고 구별하고 지키심을 알 수 있으며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혼들은 결국 그 고통이 더해지고 마침내 죽기를 구하여도 죽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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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헛된 신들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은 그들이 처음에 주는 달콤함으로 그 결말에 대해서도 낙관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들이 우상의 종노릇하게 되고 노예가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하나님보다 그러한 것들에 매이게 되고 급기야 영적 굶주림으로 고통이 시작되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공허와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되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되기까지 계속된 경고와 사인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갈수록 자신들의 선택과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며 돌이킬 기회를 놓친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개인적 사회적 고통의 기저에 깔려 있는 출발점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분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이 모든 고통과 문제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런 중에 스스로 설 수 없던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 우리로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살리신 은혜를 다시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 7-12절 하나님은 심판하는 존재들에게 일정 기간동안만 사람을 해할 권세를 허락합니다.
황충의 모양은 말 같고, 관을 머리에 쓰고, 사람의 얼굴같고, 여자의 머리털 같고, 사자의 이빨과 같은 모양을 갖고 있습니다. 철 호심경을 갖고 날개소리는 병거와 말이 달려가는 소리같고, 전갈과 같은 쏘는 살이 있어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왕이 있는데 무저갱의 사자 곧 사탄입니다. 이름은 아바돈과 아볼루온(로마 황제들은 종종 자신들을 아폴로(아볼루온과 같은 어원)의 성육신이라 주장합니다)으로 파괴자나 고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진행된 화는 아직 두 화가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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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들의 모양은 요엘 1장 6-7절, 2장 4-5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을 메뚜기 떼로 표현했습니다. 메뚜기와 전갈의 모양을 연상하며서도 전체적으로 기괴하지만 우선 은유된 표현들로 보면 이들이 가진 것들이 비슷하긴 하지만 결정적이진 않습니다. 곧 진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과 그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해할 권세를 받긴 받았지만 고통스럽게만 할 뿐 그들의 생명을 해할 권세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도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지만 이 귀신들의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모습들은 결국 불신자들이 섬기고 매인 것들의 존재가 얼마나 못된 것인지, 그리고 부질없는 것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아무런 소망도 없는 인생으로 결국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보통의 메뚜기는 왕이 없지만 이들은 왕이 있는데 파괴자 곧 사탄입니다. 그들의 이름에 모두 파괴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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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한 이들은 결국 사탄의 권세 아래서 고통받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 기한이 한정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생애동안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가고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존재에 매여 살고 있는지, 인간을 살리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길 바라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택하신 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 거둠의 기도
택하신 자를 지키시며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
악의 창궐과 흥황함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굳건하지 못하여
두려워하고 흔들렸던 적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주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서
탐욕으로 점철된 인생이기에 고통당하는 것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강퍅하게 살고 있는 이들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유혹과 시험을
깨어 있어 분별하고 휘둘리지 않게 하옵소서.
고통의 시간도 그리고 우리의 생애도
한계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삶에서
허락하신 만큼 누리고 일하고 소망하며 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