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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04. 2022

요한복음01:43-51 예수님의 증인들  

요한복음01:43-51  

요한복음01:43-51 예수님의 증인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만난 빌립 그리고 빌립을 통해서 인도된 나다나엘(바돌로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곧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된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며, 인자되시는 분입니다. 


# 본문의 위치

첫째 날(19-28), 둘째 날(29-34), 셋째 날(35-36), 넷째 날(39), 다섯째 날(40-42), 그리고 예수께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베다니(28)를 출발하여 갈릴리로 향하시기로 결정한 여섯째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에 길 가에서 빌립을 만나시고 앞뒤 정황은 없이 “나를 따르라”고만 하십니다. 제자들이나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께서 직접 자신을 소개하시는(전도) 장면입니다. 7일 창조의 배경으로 요한복음 1장을 본다면 6일째 되는 날에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모든 기초를 만드신 후에 6일 째에 교회 공동체를 만드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43-46절 빌립의 증언 -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빌립에 관한 소개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벳새다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벳세다는 갈릴리 호수와 요단 강이 만나는 지점 동쪽에 위치한 어촌(어부의 집)입니다. 빌립은 안면이 있던 안드레와 시몬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아보고 함께 동행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이때 예수께 소개를 시켰을지도 모르지만(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단정짓기는 어렵고), 예수님께서 빌립을 보시고 직접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위엄 있는 말씀 한 마디에 그 즉시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예수님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나다니엘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때의 모습 속에서 그의 믿음을 추측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안드레가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형제인 시몬에게 찾아 갔듯이, 빌립도 곧장 나다니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요 1:45)” 빌립은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지 않고 구약성경 전체에서 예언되었던 “그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성취를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즉, 전체 구약성경을 성취하시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 출신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나사렛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산 중에 있는 작은 동네로서 본문 말씀에서 기록되지 않았으면 잊혀졌어야 하는 지명이었습니다.


# 47-49절  나다나엘의 증언 -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

유다에서 갈릴리 출신은 사마리아인처럼은 아닐지라도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은 갈릴리 사람에서도 그 역할이 미미한 작은 동리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토로한 대로 수백 년을 기다려온 메시아가 나사렛과 같은 하찮은 마을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46)”

나다나엘도 역시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그저 “와 보라(46)” 그러면 믿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첫 만남에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봤듯이 말입니다. 

마치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나 하신 것처럼 그들이 가까이 오자 예수님은 반가이 맞이하시면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4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기 때문에(47)”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곱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야곱이란 어원은 발꿈치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는 유래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추론합니다. 야곱에 대한 유대사람들의 인식은 간교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는데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합니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창 27:35-36)”

*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자신을 두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에 놀라와 하면서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48)”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48)”고 답변하셨습니다. 함축적인 대화이지만, 나다나엘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더 나가서 그가 무슨 생각으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있었는지도 알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마 나다나엘은 나무 밑에서 메시아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49절에 그가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에 대한 의문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단번에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던 나사렛 출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두고 참 이스라엘 사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가진 간교함이 전혀 없는 그런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

예수님을 만난 자라면 편협적인 신앙태도나 잘못된 오해의 신학을 가졌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바른 신앙과 믿음에 오를 수 있습니다. 교회 주변에서 나다나엘과 같은 편견을 가진 신앙인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은 자가 아니고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성도가 할 일은 교회 밖의 불신자를 전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런 믿음의 결여자에게 의심과 편견을 깨뜨리고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예수님과 직접 만남을 주선해야 할 것입니다.

*

이제는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이스라엘 왕이시요,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와 백성이 출현한다는 의미입니다. 참 이스라엘이요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을 향한 나다나엘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 왕(49)”의 신앙고백은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신앙고백 위에 “더 큰 일을 보리라(50)”고 하십니다.

*

[우리는 모두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저마다의 선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 지금 내 눈에는 못마땅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고, 그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일러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른다. 거짓이 없어 외로웠던 바돌로매, 자족적 참됨에 머물던 그가 진심을 알아주는 예수를 만나 하나님의 선물이 된 것이다. 옛 사람은 회사후소(繪事後素_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 소한다)라 했다. 흰 바탕이 있어야 색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이다(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거짓이 없었기에 그는 진실 자체이신 분을 알아 볼 수 있었다.]_김기석 <말씀의 빛속을 거닐다> p22


# 50-51절 예수님의 증언 - 하늘이 열리고, 인자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신 그 일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선 야곱의 사닥다리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 큰 일”은 나다나엘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놀라운 일이 아니고 “너희”라는 교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은 그가 누웠던 벧엘에서 하늘에까지 이어진 사닥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는 그곳을 벧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시된 말씀 중에는 하늘이 먼저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열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라고 할 것입니다. 야곱 대신 인자 위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내릴 것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의 말씀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브니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매일 주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과 교제가 가능케 한 것도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임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인자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다니엘서에는 큰 권세와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시고 오시는 분으로써 인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천상과 지상을 오가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예수님께 전달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유일한 분으로서 예수님을 설명한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전달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큰 일을 볼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새 성전, 새 벧엘 즉 하나님의 집으로서 예수께서 오셨음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후 지금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스스로 세상에 자신을 소개하시고 그분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임을 천명하심으로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유일한 길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

주님은 우리를 아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할뿐더러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우리가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과, 우리는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우리는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사망의 권세 아래 눌려 있는 땅에 속한 자였으며,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결국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와 정체성과 내일과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아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세상에서 교회되게 하셔서 빛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금 주님을 대면하고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새로운 삶과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복된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

나는 지금 주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오늘 제자들이 고백하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고백은 아직 100퍼센트 제대로 된 고백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제자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바로 정복자형으로, 다윗과 같이 자신들을 핍박하는 모든 대적들을 무너뜨리고 이 땅에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 그런 메시야로 기대 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고백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후로도 여러 가지 사건과 강론을 통해서 이러한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사역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도 주님을 따르면서 이와 같은 메시아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나의 원대로 어떠한 기도의 응답을 바라며 질병과, 경제적인 문제와 여타의 일에서 소위 말하는 복을 바라며 주님을 따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초보적인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입니다.

요한이 서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님은? 종말에 옛 야곱을 대치하는 새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모아서 언약을 성취하실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어좌로 높임 받고 신성을 입어 새 하늘과 새 땅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초월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바로 이 일을 예수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을 요한은 우리에게 증언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인간의 피조물적인 한계성을 극복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 세계에 참여하는 것, 신성을 입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예수님께서는 그런 온전한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야인 것입니다.

그런 메시야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처음과 나중을 알게 된 사람의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으며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은 와보라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였던 베드로를 전도했고, 빌립은 또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일원들을 구성하는 증인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증거하는 증인이 되길 빕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전지하신 주님을 아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희망이게 하옵소서. 

곧 우리의 처지를 아시오니

궁핍도 고통도 억울함도 절망도 낙심도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처지를 아시니

주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소망을 품고 

인내로 경주케 하옵소서. 

이제 우리를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르사

거룩한 성전으로 또한 세우사

주 안에서 임마누엘을 경험하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만난 주님, 내가 알게된 주님을

온전히 주로 고백하며

만나고 보고 깨닫고 받아 누린대로 증인되어서

뭇 사람들로 나를 통해 우리 주님을 알아보게 하옵소서.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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