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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04. 2022

요한복음01:29-42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01:29-42  

요한복음01:29-42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한 이후에, 자신에게 오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 자신보다 먼저 계신 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심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또한 제자들 둘과 있다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하며 제자들을 보내고, 이에 예수를 따르게 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그 중 안드레가 자신의 형제인 시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여 만나게 하고, 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시몬의 이름을 게바(베드로)로 바꿔줍니다.


# 본문의 위치
요한복음의 서두 1~18절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로서 서시형태로 선언됩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이제 그러한 선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후에 펼쳐지는 장들에서 상세하게 다양한 증인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강론을 통해서 증거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 부분은 창세기 1장을 배경으로 기록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증거가 곧 재창조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그림은 1~18절의 선언이후에 계속 ‘이튿날’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마지막 가나의 혼인잔치의 표적에까지(2:11) 7일동안 진행됩니다. 이것은 창조의 그림을 다시한번 재 창조의 한 주간으로 제시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1~18의 주제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로 보는데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19~34절은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이 증거 됩니다. 특별히 다양한 표현 중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들어 사용합니다. 여기서 요한을 통해서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케 하는 것은 당시까지 세례요한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있었고 더불어 유대인과 유대교와의 갈등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추종했던 요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언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며 자신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뿐이라는 요한의 고백을 중요하게 언급함과 동시에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케 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35~51절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에 의해서(35~42)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게 했고(43~49)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51)(본문의 개략적인 줄거리)
더불어 첫째 날(19-28), 둘째 날(29-34), 셋째 날(35-36), 넷째 날(39), 다섯째 날(40-42), 그리고 예수께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베다니(28)를 출발하여 갈릴리로 향하시기로 결정한 여섯째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에 길 가에서 빌립을 만나시고 앞뒤 정황은 없이 “나를 따르라”고만 하십니다. 제자들이나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께서 직접 자신을 소개하시는(전도) 장면입니다. 이렇게 본문을 7일 창조의 배경으로 본다면 6일째 되는 날에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모든 기초를 만드신 후에 6일째에 교회 공동체를 만드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29-31절, 36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거듭 증언하는 말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를 표현입니다. 또한 그래서 이렇게 말하므로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 그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출애굽(12:3)의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모든 압제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의 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집은 죽음이 유월하게 해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어린양은 피를 통해 죽음을 유월하게 하는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돌아가신 것은 어린양의 모형을 그대로 성취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사야(53:7)에 언급된 ‘도살할 양같이 우리의 죄를 감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이 죄, 하나님을 왕(주)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또한 그를 모르고 살아가며,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며,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철저하게 우리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말입니다.


# 32-34절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요한은 또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예수님 위에 머물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분이 이와 같이 성령이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라 하셨기에 요한은 마침내 보고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약속은 에스겔서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약속과(겔 36:24-28), 만민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욜 2:28)의 말씀이 있는데, 요한은 지금 예수님께 이 말씀이 성취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바로 알고 믿게 하시는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구주 예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우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되심을 알고 믿고 그의 길을 따라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베푸신 성령세례는 그래서 오늘 우리고 거룩한 주님의 전으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미 받은 성령의 세례를 유지하며 성령 충만으로 살아가는 길은 매일 주님과의 사귐의 시간 곧 기도와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주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만날 수 있는 예배의 자리 등을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충만한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백성으로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길입니다.  


# 35-41절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스승인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는 말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랍비여 어디 소속입니까?”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본 뒤에 계신데를 보고 예수님과 함께 거합니다. 

이것은 당시 풍토 속에서 스승을 모실 때에 어느 분파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고 '선생'정도로 이해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직 제자들은 요한의 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탐색하고 있으며 진정한 메시야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질문에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대해서 와보라 하신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그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본문에 열 시는 오후 4시를 말합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그 시간이 기술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많은 대화가 오고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예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해서 질문도 하고 답을 들으면서 충분히 확인하고 납득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매일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주의 말씀을 통해서 대화하며 알아가는 것은 그래서 무척 소중한 일입니다. 아는 만큼 믿게 됩니다. 그리고 순종의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임함과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을 계시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알아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보여 주셔도 볼 눈과 볼 맘이 없다면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절박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볼 때라야 마침내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마음의 눈을 뜨게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자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주님을 만나고 알고 믿고 영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영생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영접하고,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새 사람, 새 백성, 새 인류, 새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은혜라 말하고,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셨기에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알고 보고 믿고 순종케 하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새 사람에 합당한 반응으로 거룩한 길로 행하길 또한 기도합니다. 

다음날, 예수님에 관해서 밤새도록 소개받고 질문했던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안드레인데, 시몬 베드로의 형제였다고 밝힙니다. 안드레는 일어나자 곧바로 베드로를 찾아 나섰고 그를 만나자 우리가 메시아(번역하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데리고 예수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알아보신 후, 게바로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마치 선 문답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광경인데, 이 말씀 중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안드레가 하루 밤사이에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가까운 형제, 일가친척에게 변화된 모습으로 전도하여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게 되면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유형을 만들게 됩니다.

특히 안드레가 베드로를 만나 우리가 메시아를 보았다고 고백한 신앙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믿음은 아닙니다. 같은 형제끼리 그것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만이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자 마자 대뜸 우리가 메시아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하룻밤 새에 갑자기 떨어져서 믿음이 생겼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실한 신앙을 고백했다고 해서 구원이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안드레의 형제 시몬은 예수께 나와서 새 이름을 부여 받을 만큼 요한복음 첫 번째 청중들에게는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존경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행적에서 수제자답지 않는 행실과 신앙태도를 목격합니다. 이것은 확고한 신앙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고백은 그의 인생을 통해 신앙적 실수와 패배를 겪으면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고백한 메시야가 아직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요한과,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한 안드레는 모두 사람들을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세운 점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만난 후에 모두 증인이 되었습니다.그리고 자신들의 보고 듣고 받은 것을 증거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증거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인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으로 추종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로 주의 백성으로 안내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려 할 때 우리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추종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교만해져서 주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어느새 목이 곧은 백성이 되거나, 주님께 돌릴 영광을 자신이 누리는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나는 전도자요 통로요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런 자로 불러 세워 주심 만으로도 감사하면서 끝까지 겸손하게 주님앞에 서고, 많은 사람들을 옳은길로 인도하되 주님이 하시고 우리는 부르심만으로 큰 은혜가운데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만나는 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전도자로 언행심사를 채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 42절 예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42절에는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을 게바(베드로)로 개명해 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종 짐승의 이름을 지어 주라고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아담이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 곧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고, 사래도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얍복강의 야곱(사기꾼)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게 변화되어야 할 것을 그리고 자신의 꾀를 의지하고 자기를 의지했던 야곱의 인생에서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주인되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개명해 주신 것입니다.

개명하는 것,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신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베드로의 주인이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불러 주셔서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더불어 그 이름 안에는 우리를 부르신 소명의 은혜와 사명의 책임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지으신 뜻이 있다는 것이고, 세우신 뜻이 있다는 것이고, 살려주신 뜻이 있다는 것이고, 구원하신 뜻이 있다는 것이며, 새창조하신 뜻이 있다는 것이고, 새사람되게 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그렇게 부르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왜 불러 주셨는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창조된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며, 더불어 지으신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로 존재 됨의 뜻과 의미와 이유와 목적들을 깨닫고 또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시고 

신실하신 주님의 은혜로 주의 자녀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요한의 증언과 주께서 보여주신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어린양 되심과 그리스도되심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우리를 새사람되게 하신 분이심을 알고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주신 분, 

우리의 모든 것 되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땅에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이기와 욕심과 탐욕의 수단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않겠습니다. 

주님의 영광이며 주님과의 교제와

주님과의 관계의 회복과,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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