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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17. 2022

요한복음 06:01-15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그 선지

요한복음 06:01-15

요한복음 06:01-15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온 큰 무리를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먹이시면서 제자들을 시험하시고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자들을 떠나 다시 혼자 산으로 가십니다. 


# 1-4절 무리(팬)인가? 제자인가?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한 표적을 본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그 무리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십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표적은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추수의 대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보시지만 제자들이 보는 것은 자신들의 추종자가 정치적 메시아일 것이라는 기대로 부풀게 하기에 충분한 무리들이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함께 해 주시면서, 아직 어린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을 지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리인가? 제자인가? 무리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지 아직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자신들이 기대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산에 함께 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양육해 가고 훈련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부족하나 주님을 따르면 아직 희망은 있고, 주님과 함께 이면 빚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길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필요를 따라 주님을 따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주는 분을 바라고 따르고 신앙하고 있다면 여전히 무리일 뿐입니다. 제자라면 주님이 누구이신지, 왜 이러한 표적을 행하시는지, 그리고 그런 표적을 통해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처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섰다 하더라도 늘 겸손하게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의 뜻 앞에 겸손하게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칫 사람들의 환호와 많은 무리들의 추종에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어느새 내가 주님의 자리에 있든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우리 욕망의 산물인 우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표적과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주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따르며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 5-6절 시험은 우리를 가르치려는 주님의 수단입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들이 오시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살 수 있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이미 주님은 어떻게 하실지 계획을 갖고 계시면서 빌립을 시험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 온 큰 무리는 이전에 추수하여 희어진 무리와 같은 무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리던 무리들, 그러나 현실은 갖은 압제와 궁핍으로 인하여 주리고 목마른 영혼들입니다. 주님은 제자 빌립에게 이 무리의 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떡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묻습니다. 주님은 계획을 갖고 계셨고 알고 계셨지만 그런 주님의 마음도 주님의 능력도 주님의 계획에 대해 빌립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진단하고 가르칠 요량으로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우리 삶에 드는 의문들은 모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현실을 허투로 생각지 않고 그 뜻을 구하고 찾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시험이라는 믿음을 갖는다면 모든 삶의 문제는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이면에 주님의 뜻과 계획을 물어야 할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감당한 후에 우리가 정금같이 연단되고 자라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 7-9절 지극히 현실적인, 그러나 상식에 갇힌 제자들을 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빌립은 떡을 살 수 있는 돈을 계산하며 웬만한 양으로는 턱도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한 아이에게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오면서 이정도 가지고서는 역시 턱도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질문은 어디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빌립과 안드레의 계산은 돈과 양이 이미 턱없이 부족하므로 예수님의 질문 자체에 대한 의문과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주님이 이런 얘기 하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답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와 방향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구할 수 있는 곳을 물었는데, 제자들은 구할 수 있는 비용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비하신 곳을 상기시켜 주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비용앞에 좌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계산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밀려오는 수많은 요구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도 역시 많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성과 상식으로는 우리 삶에 다가오는 의문과 요구와 갈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궁핍하고 부족하고 갈할 뿐입니다. 

제자들의 계산 안에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지 않았고, 어디 한 켠에 겨자씨만한 믿음도 자리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지금까지 주님이 보여주신 표적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겠지만…

결국 지금 부족한 것은 떡과 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상식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은 광신으로 흐릅니다. 하지만 상식 안에 머무르는 신앙은 얄팍한 기복주의가 됩니다. 이 둘은 모두 신앙을 가장한 불신앙입니다. 둘 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믿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불과합니다. 둘 다 자기 가능성이 미치지 않는 곳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흥분했다가 쉽게 절망합니다. 쉽게 자신감이 넘쳐 있다가 쉽게 두려워하고 체념합니다. 인내도 없고 기다림도 없는 삶이 됩니다. 문제 이면과 너머에 주님이 예배하시고, 주님이 함께하시고, 주님이 뜻하신 것이 있음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모든 현실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길 빕니다. 


# 10-13절 예수님은 원대로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 가득한 기적을 행하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앉히게 한 후에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서 공수해온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배부른 후에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셨는데, 거둔 것을 보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주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실 지 알 수 없지만 하라신 대로 순종하며 사람들을 잔디에 앉게 합니다. 주님의 면전에, 주님의 역사 앞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오천(남녀노소를 합하면 2만 정도)명 되는 이들에게 축사한 떡을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원대로 주셔서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너무도 간결하게 증언합니다. 마치 출애굽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것처럼, 터무니 없는 오병이어로 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주님은 하신 것입니다. 이는 천국잔치, 영생과 거듭남과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맛보는 표적입니다. 

다 먹은 후에 풍성하게 남은 열두 바구니의 숫자는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로 그것을 거두게 하시니 주님이 추수하게 하신 것이 열 두 바구니에 찼다고 하는 것을 보면 주님이 세우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충분히 또는 온전히 채우실 것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숫자입니다(12라고 하는 숫자는 이스라엘 지파와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같은 수로 모두 하나님나라 백성의 기초가 되는 온전한 수인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 14-15절 예수님은 사람들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의 계산과 상식을 뛰어넘는 능력이지만 이것이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풍성해 지고 부자가 된다는 의미? 사업이 잘되고 번창하고 하는 일마다 다 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표적을 본 무리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초적인 문제를 놀라운 기적으로 이루신 것을 본 무리들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로(신명기 18:18) 오해하여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십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첫 출애굽처럼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더더군다나 지금 절박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굶주림의 문제를 당장 해결했을 때 이들은 앞뒤 재어볼 필요도 없이 혹하면서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왕, 임금)로 억지로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이들을 피해서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십니다. 잘못된 메시아 관으로 인한 것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유혹과 미혹에 자신도 그리고 제자들도 빠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산으로 가십니다. 왜냐하면 한적한 곳에서 홀로 하나님과의 대면 시간을 통해서 사람의 뜻을 따른 메시아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른 메시아로 변함없이 매진할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대면만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영혼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지 않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대면을 위한 골방의 시간, 묵상의 시간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영적 분별력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고수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탐욕과 번영과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서 입술로는 구주(救主)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종부리듯 우상처럼 억지로 왕삼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도 교재, 대화도 필요없고 오로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찾는 자동판매기같은 하나님, 맘씨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이 결국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세운 왕은 다만 우상일 뿐 순종할 필요도 교재도 사귐도 인격적 교감도 필요없는 신앙입니다. 

지금 기도하고 묵상하는 골방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이 칭송하고 사람들이 억지로 끄는 대로 끌려가고 말 것입니다.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길과는 정 반대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소원과 기대에 우리가 소원과 기대를 맞추는 작업입니다. 그분이 더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의 뜻입니다. 나의 바람이 하나님의 바람이길 바라는 것이 기도이고, 내가 구하기 전에 내게 필요한 것을 내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신다고 믿고 구할 때 참된 기도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인간이 됩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여러분 인생의 왕 삼지 마십시오. 이미 왕이신 그분께 조아리십시오. 예수님을 억지로 우리 교회의 왕 삼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라는 교회, 내가 바라는 교회,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신 교회인지 살피고 살피고 또 살펴야 합니다. 억지로 왕 삼으려는 열심은 나를 부인하는 열심이 아니라 내 소원을 관철시키려는 열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성경의 가르침,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고 청종해야 합니다. 이 시대가 칭송하고 부러워하는 교회,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교회가 늘 주님이 왕 되시는 교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_박대영목사의 묵상글 중에서


# 거둠의 기도

나의 왕 나의 주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의 시험 앞에 겸손히 임하겠습니다. 

나의 소유와 능력을 가지고 

상식과 이성의 틀 안에 갇혀혀 사는 것이 아니라

무시로 함께하시는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고 계산하고 살아가며

때로 상식과 이성을 뛰어넘는 것을 보고 

분별하며 결단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옵소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이해 할 수 없을 때라도 

먼저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용기도 주시옵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되 하나님과의 대면의 시간들을 잘 지키며

사람들의 기대와 요청에 부화뇌동하는 신앙이 아니라

골방에서 대면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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