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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29. 2022

요한복음 08:42-59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

요한복음 08:42-59

요한복음 08:42-59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십니다


빛되신 주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는데도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급기야 예수님을 비난하며 귀신들렸다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귀신들렸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며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표현과 선재성등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자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 합니다.


# 42-44절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유대인들이 믿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결국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만일 하나님이 아버지였다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자신을 믿고 사랑하며 자신의 말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자신의 말을 깨달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말을 들을 줄 모르고 처음부터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왔는가? 마귀에게서 났는가?, 보냄을 받았는가? 스스로 왔는가?, 처음부터 진리에 속한 자인가? 거짓을 말하며 거짓에 속한 자인가?

아버지를 따라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깨닫고(소통과 사귐) 진리에 서서 살기를 힘쓰는가? 아니면 욕심대로 진리나 여타의 것이 아니라 거짓말과 거짓의 아비가 되어가는 길을 택하고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는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로 난 자는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 그 말씀을 듣고 먹고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주의 말씀을 대하는 삶의 열매를 보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진단이 되는 것입니다.


# 45-47절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책잡으려는 이들에게 어찌하여 자신을 믿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진리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않고 듣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이면 상속자입니다. 그 상속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삶의 내용과 방향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며 날마다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길 빕니다.


# 48-50절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급기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도 하고, 귀신 들렸다고도 하면서 인신공격까지 막말을 하고 있씁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마술을 부리는 자, 이단 자라는 의미들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자 예수님은 자신은 귀신 들린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인데 그런 자신을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이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자신의 생각과 신앙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막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지극히 지양해야 할 것들입니다. 심지어 우리 주님에 대한 신앙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신념으로 바꾸고, 사상으로 바꾸고, 종교화하면 결국 막장으로 치닫고 극단적이며 치명적인 말로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지식과 이해 안에 가두고 맞지 않으면 정죄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며 이제 급기야 죽이려고까지 막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극단적 신앙으로 혼탁한 시대에 우리도 이러한 시류에 휩쓸려 정작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그의 나라와 의를 무시하고서 결국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매다는 어리석은 길로 행하고 있진 않는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 51절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영생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영생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안에서 기쁨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회복된 관계는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이 생명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이들, 곧 구원 얻은 영생을 소유한 이들의 삶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순종하는 삶을 즐거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52-53절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8:51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에 대하여 반박 하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도 다 죽었다는 사실을 제시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스스로 말하라 합니다.

유대인들의 행태는 충격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처구니 없는 신성모독과 귀신들려 미친 사람의 말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무지와 영적 둔감함으로 눈과 귀가 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생물학적으로 죽어서 자신들이 볼 수 없는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할 때에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우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버금으로 여기는 것으로 생각하며, 유대인들이 봤을 때는 이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아브라함보다 크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는 나이가 더 많으냐고 묻는 계산 속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급기야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스스로 대답해 보라고 묻고 있습니다.

영생,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조금더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성경에서 생물학적인 죽음도 말하지만 대부분 죄와 사망의 죽음을 말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한다. 이 죽음에서 다시 살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 그래서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다시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코 끊어질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5-39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지금 그 일을 이뤄가고 계신 것이며, 이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 길을 안내하고 증거해야 할 유대인들은 정작 이 사실을 오래 전부터 소망가운데 받았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걸림돌이 되어서 이렇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모욕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말씀에 귀 기울이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 54-55절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 영광을 돌리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바로 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가셔야 하는 십자가의 길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영광의 길로 성큼성큼 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기에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계획하심을 알고 뜻을 알고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다면 예수님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알고 지금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기에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그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뜻을 계시한 말씀앞에 매일 나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시고 계시하시는 만큼 우리는 주님을 알고 믿고 따를 수 있으며,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주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적용케 하시는 성령님을 알아가는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56-59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은 지금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모두 성취 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즐거워하다가 마침내 그 일이 성취된 것을 보고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오십도 안된 예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급기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고 예수님은 숨어 성전에서 나가십니다.

56절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계시로서, 지금 아브라함이 살아 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이라는 것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과,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 아브라함이 살아 있어서 예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만(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설명하고 계시기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예수님의 때에 볼 것을 즐거워하고 또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과 지금 살아 있어서 예수님께서 성취해 가시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시간을 초월한 존재방식에 대해 이해한다면 이미 하나님과 함께한 믿음의 선조들이 주님과 더불어 우리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때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결국 참람하다 생각하면서 급기야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내가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듣고서 돌을 들어 치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생을 소유하고 살고 누리면서 또한 믿음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부활할 것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영생을 소유한 자들의 합당한 반응과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의 짐에 짓눌려 간음한 여인처럼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다. 지금 자신의 정체를 드러 내시자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 하나님의 때(카이로스)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중보와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해야 할 성전은 그 기능을 잃고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 성전이 됩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과, 유대교의 적나라한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한 사건입니다.  


#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처음부터 거짓말하던 것의 종노릇 하지 아니하고

진리되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고 알고 믿고 따르며

하나님께 속한 자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온전히 영생을 살아가는 자로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따라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우리 주님을 온전히 알고 합당하게 반응하는 일에

더욱 온전케 하옵시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주님이 허락하신 이 영생의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거룩한 성령을 품은 주님의 몸된 거룩한 성전으로서

또한 온전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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