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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30. 2022

요한복음 09:01-12 예수님은 새 창조자이십니다  

요한복음 09:01-12 

요한복음 09:01-12 예수님은 새 창조자이십니다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나 그의 장애 원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해 주시고, 아울러 시각 장애인의 눈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며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새 창조자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아울러 9장 전체에서는 예수님과 제자, 시각장애인, 이웃사람들, 바리새인들이 보는 것에 대해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지금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 주고 계십니다. 

참고로 9장의 시각 장애인에 대한 치유와 새 창조 사역은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과 같은 제자들을 새창조 통해서 성숙시켜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발단 1-7절, - 전개 8-12절 - 위기 13-23절 - 절정 23-34절 - 결말 35-41절). 


# 1-3절 예수님은 우리의 무지몽매 함을 간과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에 제자들의 그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 그의 장애가 자신의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런 원인에 대한 것보다 그의 장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역의 여정을 진행중이신대도 그 가운데 고통가운데 있는 이의 아름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9장 전체에서 이 시각 장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새창조주이시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제자들의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을 회복시켜 가시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통 당하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제자들은 그의 장애의 원인에 대해서 질문할 뿐 그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과 달리 시각 장애인의 아픔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 곧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를 회복하여 빛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의 장애와 아픔은 우리 자신의 거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픔을 외면치 않고 섬기라 보내주신 이들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통칭 소외된 자라 하는데 그들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섬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그렇게 소외된 자 곧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울러 그런 이들을 도우면서 하나님께서 소외된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사,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우리와 마찬가지 구원의 은혜를 입도록 하는 축복의 통로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하사 살려 주신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신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이들에 대한 정죄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모독이며, 우리 스스로는 죄의 올무에 갇히게 하는 격이 됩니다. 정죄와 배제와 혐오등은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될 행위입니다. 


# 4-5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은 낮이라 말씀하시고 당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뜻을 따라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밤이 오면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의 빛이시라는 사실을 앞서 증거했습니다. 이를 재차 반복하면서 지금 어둔 세상에 빛되신 주님이 오셔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우리’(예수님, 하나님, 제자들, 시각장애인 모두를 포함하나 특히 시각장애인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가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시각장애인의 눈만 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인격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을 통해서 결국 제자들의 성숙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러한 표현들 하나하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성숙에 대해서 꼼꼼하게 그리고 온전하고 전인격적으로 회복시키시고 성숙시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가능하도록 지금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하므로 일할 수 있도록 했고, 이제 예수님께서 더나시는 반이 오면 남겨진 제자들은 더 ‘큰 일’을 할 것입니다(14:12). 

빛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 맘 가운데 오셔서 밤같은 세상과, 밤같은 우리의 심령에 새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머무시며 일하시는 시간에 대한 제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때가 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는 주님을 신앙하는 우리의 여정에서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살려주신 그 뜻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 6-7절 예수님은 새 창조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창조의 언어 곧 ‘흙’과 ‘이겨’라는 단어가 창조를 연상하게 합니다. 처음 사람을 흙을 빚어 만드셨 듯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입은 이의 눈동자를 새롭게 창조해 주고 계십니다. 이어서 거듭남 곧 옛사람을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연상케 하는 행위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명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심(3:5)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제 이 사람을 보내어서 물 곧 성령으로 거듭나게해서 새창조로 새사람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창조의 주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거듭난 자입니다.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 창조된 새 피조물, 새 사람, 새 백성, 새 인류가 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새 것이라기 보다는 옛 사람 곧 하나님을 믿지 않고 듣지 않고 불순종으로 살아가는 옛사람은 죽고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되고 백성되고 새 이스라엘 된 자로 새창죄된 새 피조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실로암 못에서 물로 씻으라 하신 것은 우리의 거듭남이 물곧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요한복음의 일관된 메시지에 부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새 사람, 새 피조물에 합당한 모습과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 8-12절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웃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뜬 것을 보고 그가 이전에 구걸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하면서 못알아보자 그가 자신이 이전에 시각장애인으로 구걸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지 묻자 이 사람은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자신을 치료하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한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 그의 행방을 묻지만 알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사람을 향한 애정이 있어야 그의 변화를 감지하고 알아봅니다. 애초에 길에서 구걸하던 시각장애인에 대한 애정이 있을리 반문한 이들은 자포자기한 그의 고달픈 인생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기에, 오래도록 길가에서 구걸하던 그 사람이 마침내 눈을 뜨고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이전에 자신들에게 구걸하던 그 시각장애인이었는지 긴가민가 합니다. //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자신이 그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자 그제서야 그를 알아봅니다. 하지만 그가 보게 된것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런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에게 행방을 묻지만 이 사람은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웃의 아픔과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어떤 애정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니라’라고 하는 표현은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입니다. 시각장애인은 지금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답게 자신의 소임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과 현실에 타협하거나 핑계하지 않고 직분에 대하여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 우리는 성경과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보고 있는지, 세상을 바른 관점을 가지고 분별하고 있는지, 우리의 이웃의 아픔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진 않는지, 나와 우리 가족과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주의 말씀 듣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거둠의 기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의 아픔을 외면치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고통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도 오랜 시간동안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치 않고 작은 일에라도 정성으로 섬기길 게을리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들을 감당해 나가되

날마다 거듭나고 새롭게 태어나

온전히 성숙해 가는 여정을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아울러 우리도 이웃의 아픔을 외면치 말고

그들을 정되하고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에 앞장서기보다

인간답게 회복할 수 있도록 섬기는 일에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믿음도 주옵소서. 

성령으로 거듭나게하시고 새롭게 하신 뜻을 따라서

새사람에 합당한 거룩함으로 옷입고

우리 주님이 가신 그 새롭고 산 길로

온전히 행하는 새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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