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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31. 2022

요한복음09:13-23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요한복음09:13-23

요한복음09:13-23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는 사건은 바리새인을 포함한 자칭 유대 지도자들과 그의 부모에게 서로 다른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이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애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모들은 출교를 면하기 위해서 에둘러 목도한 현실을 부정하고 애써 구차한 면피와 회피를 위한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할 증거들을 찾고자 합니다.  


# 13-14절 예수님의 새 창조는 참 안식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시각장애를 고침받은 자의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일부러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정에서 정결케 되고, 질병에서 치유를 받을 경우에 유대인의 전통에서는 먼저 제사장에게 데려가서 그의 치유를 확인하고 공동체로 복귀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런 절차보다도 회당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에게 먼저 자문을 구하기 위해 데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한 사람의 회복보다 자신들의 전통과 오래 누려왔던 기득권과 체제의 균열에 더 관심이 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기득권자들 뿐 아니라 그들의 지도아래 있는 이웃들까지 어느새 이러한 체제에 익숙해 있어서 자신들을 자유케 하시는 분이 오셨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익숙한 지배체제의 관습에 얽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빛을 주시고, 밤같은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뜨게 해주시고, 소외와 결핍의 상황에 회복을 주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소망없는 현실에 참된 안식을 주시며, 하나님의 부인과 부재의 현실에 임마누엘로 역사하신 모든 일은 주님의 새창조 사역이었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선포하고 증거하며 가르쳐야 할 바리새인들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였던 이를 외면했고, 그들 스스로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안식일을 지켰으나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으나 그 하나님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회복하도록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서 사역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진흙같은 우리를 그 능력의 손으로 빚으시니 사람이 되어 존재가 되었으며, 주님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안식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살리신 것을 깨닫거든,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거든 거기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그렇게 고치신 분의 뜻을 따라 그분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 우리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그에 합당한 반응으로 나아가고, 그로 말미암은 결과 곧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반응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목도하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 15-17절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지자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를 어떻게 치유받았는지 묻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진흙을 눈에 발라 씻고 보게 되었다고 하니 바리새인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문제 삼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고, 죄인이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냐 하며 분쟁이 있습니다. 다시 고침받은 이에게 물었을 때 이번에는 예수님을 '그 사람'에서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시각장애인의 치유를 목도하고도 이를 행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치유의 목적과 뜻에 관심을 갖기보다 이를 문제삼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있는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빌미를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눈을 뜨고 있어도 진실과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들은 위를 통해서 난 자도 아니고, 믿음을 가진 자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정죄합니다. 바리새파의 규율에 있는 안식일 위반 조항 곧 눈에 연고를 바르는 행위, 흙과 물을 섞어 반죽하는 행위, 새명의 위급한 경우를 제외한 질병에 개입하여 치료하는 행위를 지목하여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신13:1-5)으로도 규정합니다. 어떤 이는 죄인으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

분명 자신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안식일과 하나님과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 이와 같은 신념의 체계를 통해서 누려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면서 분명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한 자신들의 입지를 애써 부정하면서 서로 다는 판단으로 분쟁하고 있습니다. 이 분쟁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이와 같은 분명히 다른 반응으로 갈라집니다. 주님은 다시 이 복음 안에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논쟁 가운데 예수님께서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실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이며, 죄인이 아닌 의인의 표적이고, 약속된 선지자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안식하지 못하는 사람을 안식하게 했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셨기에 실로암에 보내어 시각장애를 치료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고, 죄인이 아니기에 이와 같은 표적이 나타났고, 마침내 치유받은 이의 입술로도 이제는 자신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선지자라는 고백하게 하는 용기를 갖게 하셨습니다. 눈을 뜬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고, 볼 수 없었던 시각장애인은 이제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도 열려서 혹독한 대가를 감수하고서라도 눈을 뜨게 하신 분을 증언하는 제자로 거듭나고 있는 것입니다.


# 18–23절 부름받고 믿는 자만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계속 인정하지 않고 이제는 그의 부모를 불러서 추궁합니다. 진짜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이 맞는지 잔인하고 위협적으로 심문하듯 묻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아들인 것을 인정하지만 그가 누가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넘깁니다. 그가 장성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부모들이 유대인들이 누구든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에 부모들이 출교를 두려워하여 이렇게 회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유대교 공동체에서의 출교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습니다. 그곳만이 사는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고, 그런 관습과 전통에 묻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모뿐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통과 관습이 왜곡되고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종교적 신념으로 자리하여서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체제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손에 들린 종교적 언어와 전통이라고 하는 것들은 때로 살상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욕망실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기득권의 지배하에 오래 살아온 이들도 어느새 거기에 익숙해서 빼앗긴 자유와 안식으로 말미암아 제약되고 부자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듯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한 꼴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이러한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의 눈을 뜨게하고, 빛으로 나아오게하고, 오랜 관습에 물들어 자신들의 처지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들을 깨워주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부모들은 변질되고 왜곡된 곳에서 출교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그곳에서 구출(출교)해 주시는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회피하고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고 소속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자이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서 시인하고 따라야 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거듭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헛된 것들에 매이고, 잘못된 관습과 전통속에 갇힌 우리에게

진리의 복음에 대해 합당하게 반응케 하시고

참 자유와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와 우리의 신앙의 모든 행위들이

왜곡되거나 변질된 것을 자각하게 해 주시고

혹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의 빛 앞에 밝히 드러내어

고침받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우리가 가진 한계 있는 기득권과 소속과 소유의

상실과 이탈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것과,

우리 주님의 역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주님의 치유의 손길 아래에 참 안식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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