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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2. 2022

요한복음09:24-41 예수님은 심판하러 세상에 오신

요한복음09:24-41

요한복음09:24-41 예수님은 심판하러 세상에 오신 인자이십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을 비난할 빌미를 찾고자 했던 유대인들은 당사자와 그의 부모를 심문했지만 협박이 통하지 않자 다시금 고침받은 이를 다시 소환하여 심문합니다. 심문이지만 실상은 신앙 언어를 사용한 폭력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과 전통이 드러나지만, 고침받은 이는 오히려 예수님을 더 분명하게 알아가며 제자가 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만나 주시며 당신의 인자되심을 드러내자, 고침받은 이는 예수님을 주로 믿지만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정죄를 받게 됩니다.


# 24-25절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온전히 아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집요하게 고침받은 이를 불러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듣고자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죄인으로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침받은 이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지만 자신이 분명히 그분을 통해서 지금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는 의도는 자신들의 원하는대로 예수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적 언어로 치장하고 포장해서 오래도록 자신들의 옆에 있었으나 그의 고통과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다가, 그가 치유를 받자 자신들의 한계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이로 말미암아 좁아질 입지등의 손익계산을 통해서 분명한 사실과 진실에 대해서 알려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애써 자신들의 언행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종교적 언어로 심각한 살상과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도덕한 날조와 조작을 신앙의 행위로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자신이 지금 분명히 이전에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고침받아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냐는 증언을 통해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신학이 직면한 사실과 현실과 다른 관점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반복해서 발견된다면 분명 겸손히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설령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아성이 무너지고, 여러가지 변화와 수정을 요구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때론 자신이 누린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하고, 쌓은 명망등에 손상이 갈 수도 있을 때는 더더욱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또 나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통해서 그런 현실을 맞닥뜨린다면 더더욱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가진 힘으로 상대편을 바꾸거나 위협하므로 내 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가리는 엄청난 폭력이라는 사실을 정당화하고 신앙의 언어로 포장하면서 말입니다.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진단과 결단과 실행을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은 지금 그의 모든것들의 점점 더 자라고 변화되고 성숙해 가고 있음을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에서 그 진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성숙으로 볼 수 있습니다(예수라 하는 그 사람(11절) - '선지자'(17절) - 마치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로 여기는 듯한 발언(27절) -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33절) - 마침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를 경배(38절))


# 26-34절 하나님은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어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고침받은 이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 재차 묻게 되자 고침받은 이는 역질문과 제안을 통해 그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우선 자신이 이미 말했는데도 왜 다시 말하라 하는지 반문하고, 당신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지 묻습니다. 이에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 말하면서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는 아는데 예수는 출처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고침받은 이는 이를 이상히 여기며 분명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왜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지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죄인의 말은 듣지 않지만 경건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듣는 줄 안다 하고, 창세 이후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고침받은 이를 재차 정죄하고 힐난하기를 그의 아픔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가르치려 하느냐하고 쫓아냅니다.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 자신들이 이미 결론을 내려 놓고 그런 답변이 나오도록 집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침받은 이는 이러한 일련의 심문 과정 속에서 점점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 자신은 예수의 제자인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것인지 묻습니다. 그들은 펄쩍 뛰며 자신들은 근본없는 이의 제자가 아니라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이미 모세도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분이기에 그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았어야 하는데 지금 모세가 내다본 주님이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갈 길을 지정하고 싶은 것이다. 대체 누가 불경한 것인가?"_김기석목사의 책에서

계속해서 고침받은 이는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을 듣지 않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 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경건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치유해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창세 이후로 시각장애를 고친 분이 없는데, 그렇게 하시는 분이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이 고백과 실천이 병행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고침받은 이는 점점도 온전한 이해와 고백으로 성숙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아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될 때 온전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신앙도 온전함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뿐 아니라 그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일치될 때 온전한 믿음입니다.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자신들의 논리에 헛점이 드러나고 있으니 버럭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모순과 문제점이 드러나자 힘과 폭력으로 고침받은 이를 위협하듯 말하면서 그의 장애를 그의 죄의 결과라고 단정지으며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렇게 고침받은 이를 아무런 죄목도 밝히지 못하고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의 잣대로 출교시켜 버립니다. 배제와 축출을 통해서 자기들이 누구인지 고수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위협을 예상하고도 진실을 말한 이, 그런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은 이. 마침내 공동체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하고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당당하게 고백한 이가 지금 고침받은 이의 모습입니다. 그 앞에서 오늘 우리가 두려워하며 온전한 고백과 신실함을 지켜내지 못한 연약함들을 주님앞에 내려 놓고 도움을 구합니다.


# 35-38절 예수님은 소외된 자에게 끝까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고침받은 이가 쫓겨 나자 예수님은 이를 듣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인자가 자신임을 밝히자 마침내 고침받은 이는 예수를 주로 믿음을 고백하고 경배합니다.

주님이 먼저 들으시고 그 사람의 처지를 아시고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인자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서 지금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시면서 고침받은 이가 점점 온전한 고백과 영접과 영광을 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언제고 우리가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주시고, 불러 주시고, 손 내미시고, 용서하시며, 치유하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 주님 앞에 합당한 반응은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미신 손을 잡는 것과 찾아오신 분을 대면하는 것과, 말씀하신 것을 잘 듣고 품고 행하는 것등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날로 더 성숙해 질 것을 믿습니다.


# 39-41절 예수님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은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못 보는 사람은 보게 되고, 본다 하는 이들은 보지 못하게 되는 역설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오만과 기만과 무지에 대해서 드러내십니다.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이사야 42:19)

고침받은 이는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믿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또다시 이 말을 문자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진정 자신들을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라 고백하며 겸손히 인정했으면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봄에 있어서도 왜곡된 지식으로 그를 정죄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질병이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쉽게 어떤 문제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달리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또 다른 편으로는 그런 질병이 없는 이는 모두다 의인이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오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합육신의 눈이 어두운 이는 눈을 떴고, 영적으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눈은 오히려 가리우셨습니다.  

교만과 무지는 정작 보고 고백하고 고쳐야 할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욕심이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자만과 무지는 우리의 주님의 말씀과, 모든 경로를 통해 주시는 주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는 일이 많이 부족해집니다.

*

"보다"는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첫째, 믿음으로 가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가집니다(4:48; 11:45; 20:29). 빌립도 사마리아 여인도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청할 때 "와 보라"라고 말합니다(1:46; 4:29). 둘째 보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적인 시각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영적인 시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다"는 '이해하다' 혹은 '깨닫다'의 뜻입니다(9:39-41). 셋째, 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3:3; 8:56).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_<묵상과설교>


# 거둠의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긍휼의 주님

참된 경건과 순종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길 원하오며

종교적 언어로 치장한 위선을 경계하고

신실한 몸과 마음으로 주를 경외하며

우리 주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온전한 고백을 갖기 원합니다.

주님의 제자이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이 땅에서의 명성을 잃을 것을 두려워 말고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의 한계 앞에 겸손케 하며

진실로 내 눈을 열어 주를 온전히 바라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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