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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2. 2022

요한복음10:01-21 예수님은 양의 목자와 문이시며

요한복음10:01-21 

요한복음10:01-21 예수님은 양의 목자와 문이시며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양을 치는 상황과 관련하여 당신의 정체성과 사역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우선 양을 인도하는 목자로 설명하고,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삮꾼과 달리 양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선한 목자이시며 이를 통해 목숨을 버리고 얻을 권세를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는 것도 밝히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또 분쟁합니다. 전체적으로는 9장의 시각장애인 기적사건이 배경이 됩니다. 


# 1-6절 예수님은 양을 인도하는 양의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시각장애인의 사건을 통해서 소위 그들의 지도자로 자청하는 이들의 무자비함과 무정함과 무지와 무식의 상황과 목적에 대해 분석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양을 치는 것과 관련된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문화에서 양을 치는 상황은 일상이었고, 그런 양들을 목양하기 위해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것과 밤이 되면 쉼을 위해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상이었습니다. 특히나 밤에 이 양들을 쉬게하기 위해 울타리 안으로 양을 불러 들일 때 문을 통해서 불러들이고, 그 문을 통해 드나들지 않고 넘나드는 자는 모두 강도요 절도자임을 언급하십니다. 반면 양의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고 그런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가지만 그렇지 않은 타인은 따르지 않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절도며 강도, 타인은 모두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왜곡된 전통과 관습에 갇힌채 알량한 권력을 행사하며 신앙을 빙자하여 위협을 가하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지도자라 한다면 양의 문을 통해 양들을 인도하고, 양의 처지와 상태를 알고서 부르며, 양보다  앞서서 그들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양들도 그런 목자를 알고 따르지만 알지 못하는 타인은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합니다. 

앞서 고침받은 시각장애인을 두고서 그와 그의 부모를 위협하면서 집요하게 예수를 비난할 빌미를 찾으면서 정작 고침받은 이의 상황이나 그의 부모의 처지에는 관심도 없었던 이들을 연상케하고, 그들앞에 오히려 변화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의 모습 또한 앞선 목자를 따르는 양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영적 무지가운데 제대로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7-10절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는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양들이 드나들며 물과 꼴을 얻기 위해서, 또 쉼을 얻기 위해서 드나들어야 했던 그 문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모두 절도요 강도이기에 양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생명을 얻게 하는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서라야만 구원을 얻고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도둑은 도둑질과 멸망이 목적이지만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백성들의 처지와 그런 상황에서 구원하고 생명을 부지하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정쟁에만 몰두하는 정치 지도자들과 자신들의 종교 전통과 관습 그리고 기득권의 수호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이들의 위선에 대한 엄격한 태도로 그들을 도둑과 강도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권력에 도취된 이들의 태도가 가난한 이들을 도울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데 대해 주님은 분노하신 것입니다. 소외된 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처우가 정의와 공의의 척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아픔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들을 만나고 어루만지시며 고치시고 싸매시며 치유와 회복 곧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영육의 참된 양식을 공급해 주셨으며, 지친 영혼들을 쉬게 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과 어둠속에서 방황하며 죽어가던 이들을 살리는 생명을 얻게 하시는 일을 위해 친히 앞서 그 길을 예비하시며 길이 되어 주셨고, 그 길을 따라 생명을 누리며 참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 양의 문이신 주님을 알고 믿는다면 강도와 도둑의 위협과 음성을 분별하여 부화뇌동하지 않고 생명을 얻게 하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가 앞서 가신 그 생명의 길로 행하는 대로 따르는 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결핍과 고난의 여정 속에서도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부요를 누리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지금 이 선한 목자의 음성을 잘 분별하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 순종해 갈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도둑의 소리들이 쉼없이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자칫 깨어있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새 세상의 방식과 처세와 가치를 따라서 휩쓸려 살아가면서 그 길이 벼랑으로 모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이끄는 길로 치닫는 것처럼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종교 지도자들의 집요함들은 이러한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11-18절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주십니다. 먼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삯꾼은 양을 버리고 달아나 돌보지 않기에 이리에게 양이 끌려가고 해코지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 것이 마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같아서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우리 밖의 양들을 인도하여 한 무리로 만들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 되신 아들은 빼앗기기 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모두 아버지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에 대한 개념, 이방인을 인도할 계획,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들까지 하나하나 선한 목자의 길과 사명과 이를 위한 대가가 무엇인지 주님은 분명히 알고 친기 선한 목자의 길을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로 온전히 순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그 외로운 길을 가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그를 붙들고 있기에 그 길을 가실 수 있다는 것을 권세를 통해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17절 말씀 : 강력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살기 위해 죽습니다. 죽어서 사는 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누추함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죽음과 맞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 죽음에 대해 죽으신 분, 영원한 자유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죽어서 산다'는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_김기석목사의 글

지금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며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마침내 우리를 살리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계신가요? 묵상은 그렇게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그 주님이 죽음을 이긴 죽음, 다시 생명을 얻게 하는 죽음, 그래서 누군가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죽음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께 받은 그 사명의 길을 오늘 우리에게 생명으로 사명으로 주어진 줄 믿기에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바라보고 한껏 허리춤을 바짝 조여 봅니다. 


# 19-21절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늘 의견이 갈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다시 분쟁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귀신들려 미쳤는데 왜 그의 말을 듣느냐 하고, 어떤 이들은 귀신 들린자의 말이 아니라 합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았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낀 안경이 색안경이 기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기대한 그 선지자와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수용할 수도 없고, 그러니 믿을 수도 없는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기에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자신들의 지식의 한계 안에서 해석하나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고작 귀신 들렸다 그렇지 않다 하는 논쟁만 있을 뿐 진실을 직시할 믿음도 능력도 지식도 지혜도 없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한게 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했는데, 지금 이들은 모두 제대로 본다 착각하는 이들이기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진리,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거룩인 것은 그들이 어둠 가운데 있어서 빛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에 속하기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오히려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을 향해 미쳤다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조금씩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이라면 어찌 시각장애인을 치유할 수 없는데 실제 그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자신들의 신앙과 지식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일 말씀앞에 나아갈 때 견고한 진을 깨는 강력이 우리의 잘못된 습관이나 전통이나 지식과 지혜를 바르게 교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교정할 뿐 아니라 바뀐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성령께서 행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거둠의 기도

양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쳐 지키는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분별할 수 있는 귀와

목자의 인도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소서. 

무엇보다 복자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주님이 새롭게 하시는 그 은혜를 

풍성히 얻게 하옵소서. 

성령을 통한 영적 분별력을 갖고서

허탄한 소리와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이 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사랑하고 살리고 인도하셨기에 

오직 선한 목자이신 주님만 바라며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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