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8:28-38
요한복음18:28-38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세상에 오신 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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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유월절 이전에 예수님을 처벌하기 위해 조급하게 불법을 행하면서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이에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인지, 왕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심문하고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답변하시며 오히려 빌라도를 심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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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32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행하시는 분입니다.
정결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정작 밤에 심문하면 안되는 법은 어긴 이들, 유월절 잔치는 먹고자 하면서 그 유월절을 성취하러 오신 주님을 몰라보고, 그렇게 살려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무지한 이들, 행악하지도 않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왜곡된 기준으로 고발하는 유대인들, 자신들의 법대로 돌로 쳐 죽이는 권한이 있으면서도 로마의 법을 따라 예수님을 죽여서 자기들 손에는 피를 뭍히지 않고 떠 넘기려는 이들, 빌라도가 상기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거짓을 말하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위선과 독선에 빠져 있고,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탐욕과 방종과 위선으로 가득한 이들, 그래서 본말이 전도된 것을 부여잡고 집요하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이들이 바로 자칭 하나님이 택한 백성 유대인들입니다.
밖으로 나온 빌라도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체 하며 고발의 사유를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빌라도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이미 내통하고 있었음을 압니다. 그는 수하의 군인들을 보내 예수님의 체포를 돕도록 하지 않았던가요?(18:3) 불의한 공모자인 그가 마치 공정한 재판관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죄를 특정하기보다는 예수가 ‘악한 일을 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언어는 누가 부리느냐에 따라 진실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거짓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악합니다다. 자기들의 어둠을 폭로하는 존재였으니 말입니다. 선과 악은 이렇게 쉽게 뒤집힙니다. 그들은 비루한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빌라도를 칼로 사용하려 합니다. 비열하기이를데 없습니다.
하늘에 속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지 않기에, 그래서 땅에 속하고, 하나님 아닌 종교를 사랑하고, 전통과 함께 하며 하나님을 섬기다 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며 심지어 종노릇하고 있기에, 무고한 예수님, 왕되신 예수님, 그리스도 주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스스로 악하게 쓰임받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몽매함이 메시아 앞에서도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행태를 자행하고도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령을 아는 지식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경도 하나님도 오해하게 되면, 그래서 그 양날의 검인 말씀의 거울앞에 날마다 서서 성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탐욕의 노예가 되고,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버리고, 세상의 논리에 빠져서 눈이 어두워지고, 정작 듣고 깨달아야 하는 일에는 둔하고 자신들의 짧은 지식 안에 갇혀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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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년 전 정치적 상황속에 부득이하게 임시로 주어진 기소와 수사권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이들이 지금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못하며 불법적 집단행동을 하면서 전혀 문제의식이나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들의검사(檢事-한문은 칼(수사)이 있는 劍이 아니라 檢이고, 士가 아니라 事다) 모습에서도 예수님을 불법적으로 없는 죄를 누명을 씌워 죽음으로 내어 몰면서도 전혀 문제인지 모르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교회는 더더욱 공적인 슬픔과 분노가 실종된 종교로 전락되어 종교 중독에 취해 우상숭배와 진배 없는 행태를 자행하면서도, 또 교회의 자원과 세를 자기 권력으로 착각하면서 강단과 세상에서 정치적인 행위를 하면서 정작 부패하고 위기 가운데 있는 스스로의 자정 능력도 상실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교회의 구성원 중에 한 사람으로, 뿐만 아니라 그런 교회의 소위 지도자라는 목회자로서 함께 부화뇌동하면서도 발악하면서도 정작 방향과 내용과 주변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져 가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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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6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왕이십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스스로 한 말인지,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인지 묻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판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넘겼는데 예수님이 대체 무슨 잘 못된 일을 했는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은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았고, 만일 세상에 속한 것이면 종들이 싸워서 이 법정에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하지만 헤롯과 더불어 로마의 지배하에서 총독인 빌라도에게 이런 얘기들은 식민지의 광인일 뿐이라고,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한 반란이나, 황제모독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맘만 독하게 먹고 삐딱하게 본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판단할 수 있기에 예수님은 빌라도의 이야기가 스스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이나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질문하는 것인지 되묻습니다. 꼭두새벽에 몰려온 무리들 앞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도발은 빌라도를 발끈하게 합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자신에게 넘겼다고 말씀하시면서 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묻습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위엄 앞에서 조심스러워 하는지, 아니면 체면치례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죄목을 찾기 위해 질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된 이유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심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비록 빌라도 자신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러나기에 오늘 우리는 이 과정에서 우리 주님을 더 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나라 곧 통치 방식은 이 세상과 다릅니다. 만일 이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유대인들처럼 폭력과 무력으로 싸워서 자신을 여기까지 오지 않게 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과 주님의 통치 방식은 다릅니다. 주님의 통치 방식은 세상 방식처럼 약육강식, 적자생존, 힘과 폭력 그리고 무력으로 사람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넓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과 나눔, 낮아짐과 사랑, 포용과 용납, 개방과 자유가 보장되고, 소외된 자 곧 가난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등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연약한 이들에게 넘겨지되 마치 자발적으로 잡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이도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음을 후일에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당대 세계를 제패하고 유대인의 왕위에 군림하는 빌라도로서는 피식민지 국가의 작은 소란과 그 장본인이 지금 하는 이야기들은 민란의 소요 아니면 귀찮은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운 피지배 국가의 이단아의 선동정도로 이해하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싶으나 민란이 날까 두려워서 형식적인 심문의 절차를 밟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요, 주님의 통치 방식은 사랑이요, 주님의 나라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흐는 나라요, 남녀노소, 빈부격차,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요 서로는 지배하거나 군림할 수 없는 대등한 나라요, 소외된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요,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의 보배로운 소유요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되심과 유월절 제물 되심과 화목케 하심과 섬김이 십자가 희생의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은 줄 믿사오며 또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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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38절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번에 빌라도는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왕인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백을 따라 자신의 왕되심을 인정하십니다. 이를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해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는 그러면 진리가 무엇인지 묻지만 정작 그 답변은 듣지 못한 채 유대 군중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찾아가서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이는 세상의 왕과는 다르고, 세상의 방식과도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폭력과 무력과 위협과 강제적인 방식의 통치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목자요, 소외된 이들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사랑으로 찾으시는 왕이십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제물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당대 팍스로마의 권세를 다라 파견된 빌라도로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통치이념과 복음 곧 진리로 알고 있는 황제중심의 통치관과 국가관으로서는 아무런 저항도 힘도 없는 초라한 예수님이 왕이시라하고, 그런 예수를 죽이겠다고 새벽부터 잡아 떼로 몰려와서 고발하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묻긴 하지만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광자의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하면서 그런 예수님의 힘없는 모습에서 아무 죄를 찾을 수 없기에 그렇게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예수님의 음성 곧 예수님의 왕도심과 통치하심과 사랑하심과 대속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보고 듣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착각하면서 종교와 전통에 사로잡혀 있고, 힘과 제국의 종교에 사로잡혀 있는 빌라도로서는 진리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도 못하는데, 불법적인 상황을 모면하고 민란을 두려워하여 무리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면서 처리해 버리는 우를 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유하고, 지식과 과학의 발전으로 부족함 없는 시대를 산다고 소위 먹고 살만해지니 어느새 진리에 대하여 뵈는게 없고, 진리보다 더 나은 처세술을 따라서 보이지 않는 하늘의 뜻은 들리지도 들으려고도 듣지도 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에 진정성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돌아봅니다. 소위 진리에 대한 절박함, 간절함, 진심이 사라져 버린 시기에 살아, 우리의 신앙이 허울뿐인것은 아닌지도 돌아봅니다. 우리의 알량한 지식과 힘과 권세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진리와 생명과 길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 삶을 조명하고 성찰하고 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겸손이 아닌 자고함과 교만은 결국 자멸의 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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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의 길로 행하시는
주님을 알고 영접하고 믿는다 하면서도
어느새 알량한 권력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져서
불법을 행하는 자로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왕되신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주님의 통치에는 귀기울이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전통과 관습과 습관과 타성에 젖어
스스로 왕이되고 하나님 아닌 것의 종노릇 하는
헛된 우상에 빠진 모습도 보입니다.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면서도
세상의 방식에 더 귀 기울이고,
또 그런 처세와 방식에 익숙해져서
사랑과 겸손과 온유함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길을 따르지 못하고
혐오와 배제와 폭력과 무력과 힘으로
사랑해야 할 것을 오히려 지배하고 이용하는
그러한 불법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우리의 왕되심을 온전히 기억하고
구주되신 주님의 은혜에는 감사하며
왕되신 주님의 통치하심에는
온전한 순종으로 반응하며 살기 원합니다.
오늘도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기 원합니다.
주님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