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최은영 소설, <밝은 밤>을 읽고

by 스마일펄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 맥과이어 교수는 세상과 소통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윌 헌팅이 어린 시절 받은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자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고 말을 건넨다. 그것도 무려 열 번이나 강조해서 반복한 끝에 그제야 윌에게 진심이 전해지고, 윌은 숀의 품에 안겨 오열한다. <밝은 밤>에서 4대로 연결되는 삼천이-영옥이-미선이-지연이를 만난다면 우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이혼한 지연은 희령 천문대에서 새롭게 일자리를 구하고, 열 살 이후로 본 적 없는 할머니와 희령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할머니에게 증조모(삼천이)와 그 친구 새비, 할머니와 희자 할머니, 엄마로 이어지는 곡절이 서린 이야기를 듣는다. <밝은 밤>은 그 과정에서 결핍의 대물림을 드러낸다. 단절된 관계와 애매한 중간 지점 어딘가에 놓인 관계, 상처와 관계의 회복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지연은 자신이 느끼는 결핍의 본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왜 엄마와 관계에서 깊은 골짜기가 생겨났는지, 왜 엄마는 할머니와 인연을 끊고 살았는지 점차 알아간다. 할머니와 다시 관계를 잇는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자신의 내면, 가족과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어린 시절 좋은 추억이 남은 자신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희령은 부모님, 배우자와 관계가 어디에서부터 어긋났는지 이해하는 필연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삶, 즉 정상 가족에 집착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이혼한 딸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허접한 남자라도 울타리가 되는 법이라고 조언한다. 지연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늘 고독했다. 엄마는 할머니와 법적으로 모녀 관계가 아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중혼인지 모른 채 결혼했고, 부인이 나타나자 할아버지는 떠나버렸다. 엄마는 호적상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그 사람의 부인 자식이다. 사람들이 이 약점으로 책잡을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증조부는 할머니를 전혀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았다. 사위가 중혼인 줄 알면서도 딸을 결혼시켰고, 할머니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도 인정받고자 순순히 결혼을 받아들였다. 증조부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갈 처지인 증조모를 구하고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백정의 딸과 결혼한다. 자신은 증조모를 도우려고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은혜를 갚지 않고 당당한 아내의 모습에서 평생 억울함과 울화를 안고 산다. 증조모는 남편이 자신을 빚쟁이 대하듯 하는 억울한 마음을 풀 길 없이 입을 꾹 닫고 살았다.


4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았지만 서로 정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절된 관계는 애정 결핍을 낳았고, 인정받기 위한 무리한 행동으로 이어져서 또 다른 단절된 관계를 야기하며 감정적 결핍과 고립을 대물림한다. 그래서 지연에게서 때로는 미선이나 영옥, 삼천이의 모습이 겹쳐서 보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미선이가 자신을 아버지 호적에 올려달라고 했는가. 영옥이가 아버지에게 미움받을 짓을 했는가. 삼천이가 백정의 딸로, 가혹한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것이 죄인가. 최은영 작가는 이전에 밝힌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작품관을 <밝은 밤>에서도 이어간다.




이들은 자신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상처투성이 마음이 아문다고 느낀다. ‘맛이 좋아요, 아즈마이’, 자신이 한 밥을 먹고 난생처음 맛있다고 한 새비의 한마디는 지독하게 외로웠던 삼천이의 마음을 도닥였다. 지연이가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자신을 탓한 남편에게 제대로 사과받지 못한 분노를 토로하자 할머니는 ‘안다, 내가 알아’라고 말한다. 엄마에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 짧은 한마디를 말이다.


회복은 외면한 자신의 마음을 직시할 때 일어난다. 지연은 엄마가 문제를 회피하고 마치 없던 일처럼 참으며 산다며 공격했지만, 정작 자신이야말로 원가족과의 문제에서 도피하고자 결혼을 선택했다는 진실을 인정한다. 엄마도 죄책감 때문에 원래 세상에 없던 존재처럼 여기던 죽은 큰딸의 사진을 정리하며 현실을 받아들인다.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에서 수진은 용서란 미움에 방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라고 말한다. 관계의 회복은 거짓으로 감추던 미운 내 마음에게 용서라는 방 한 칸을 내줄 때 일어나지 않을까. 애초부터 내 잘못도 아니었으니까. 엄마와 사진을 정리하다 발견한 거북이 해변 사진을 지연이가 할머니 집에서 발견했을 때, 나도 같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