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소향 Jul 09. 2018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

#4 여운이 남는 독서리뷰_5.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고1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음 날 역사시험을 위해 벼락치기로 외우고 있는데 도저히 내용들이 외워지지 않았다. 초조하게 시간만 흐르고 졸음이 쏟아져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방 벽면에 전지를 두 장 붙여놓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씩 정리해가며 쓰기 시작했다.

어떤 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어떤 정책을 폈으며, 문화적 특징은 어땠으며, 여진족과 거란족의 침입 경로와 배경도 형편없는 그림 실력으로 전지를 조금씩 채워나갔다.

그렇게 전지를 가득 채우고 외우며 꼴딱 밤을 새고 역사시험을 봤다.


결과는.................?



79점. 망했다.

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벼락치기로 대략적인 배경과 흐름은 외울 수 있었지만 디테일한 부분은 외우지 못했고, 두 번째는 유형 문제들을 전혀 풀고 가지 못했다.

시험도 시험이지만, 벽에 붙인 전지에 매직으로 내용을 적었기에 벽에 매직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시험도 못 봤는데 별짓 다한다며 엄청 혼이 났다.


그런데 이 방법이 내게는 참 잘 맞았다. 다음번 시험에서 위와 비슷하게 시험 준비를 하니 성적은 수직 상승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부했던 역사공부가 대학 입학 후 멈춰섰다.

공부해야 할 뚜렷한 목적이 없었으며, 역사하면 재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최근 하브루타 교육에 관심이 많다. 유태인 교육의 한 방법인 하브루타는 탈무드(혹은 코란)를 통해 진행하는 문답식 교육이다. 이를 우리 교육에 맞게 변형하려면 우리만의 콘텐츠가 필요한데 한국사만한 것이 없기에 최근 한국사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이번에 공부해야 할 파트는 '조선'이었는데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은 518년의 조선역사를 27명 왕의 이야기를 통해 흥미롭게 기술하였다. 활자들은 마치 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전개되었고, 이야기들이 매우 쉽고 논리 정연하게 펼쳐졌다. 이제는 외울 필요가 없어진 조선역사 속 사건들 가운데 내가 몰랐던 그리고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사건들만 떠올려봤다.


1. 잠실은 본래 섬이었다.

조선의 제 16대 임금인 인조가 후금과 명나라 사이 중립외교를 잘 하지 못하여 후금(청)이 1636년 우리나라에 쳐들어 온 사건이 병자호란인데 이때 지금의 잠실로 끌려간다. 그때는 나루터였던 지금의 삼전동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가 땅에 큰소리로 닿을 때까지 3번씩 3회. 총 9번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병자호란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잠실 삼전동이 나루터였단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매립해 지금의 잠실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얼마 전 잠실에서 발생한 싱크홀과 고층아파트와 빌딩이 즐비한 잠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재건축으로 인해 더 고층아파트와 인구가 밀집할 텐데 매립한 곳의 지대는 안전한지.. 철저한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2. 폭군의 탄생은 유전이었을까? 자라난 환경 때문이었을까?  

지금은 우리가 대통령을 선거로 선택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는 무조건 태조 이성계의 후손들만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선택의 기준은 달랐지만, 예나 지금이나 성군과 폭군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폭군은 누가 뭐래도 조선의 10대 임금인 연산군입니다. 어쩌면 그가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성격과 어릴 적 어머니의 죽음(사약을 받아 죽게 됨)을 알게 되며 자연스레 발전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폐비 윤씨가 중전이 되기 위해 내면의 표독함은 숨긴 체 중전이 된 후 그 본모습을 드러냈듯, 연산군 또한 자신이 왕이 되기 전까지 철저히 자신의 본모습은 숨겼다.

왕이 되자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 주동자들을 색출해 잔인하게 죽이고 천명의 기생과 향락만 즐긴 폭군으로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부모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조선의 왕이 한 명 더 있으니 그는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였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에 갇혀 끔찍하게 죽어간 사도세자였다. 사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장본인은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였지만 그 배후세력은 노론이었다. 부자간을 끊임없이 이간질하여 결국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세력의 모습을 지켜보며 묵묵히 10년간 세자 수업을 받은 정조는 드디어 왕으로 취임하던 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로 노론을 벌벌 떨게 하지만 연산군과 다르게 피의 숙청을 하지 않고 노론세력 또한 등용하며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성군으로 역사서에 기록된다.  


비슷한 가정환경을 가진 연산군과 정조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내 생각으로 그 답은 어머니였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질투심이 강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부인)는 그 평이 조금 갈리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이 서있을 곳과 물러날 곳을 아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기록된다. 이런 걸 보면 환경요인 못지않게 원래 갖고 있던 자질 또한 중요한 것임을 역사를 통해 다시금 느끼게 된다.


3.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없었더라면?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세종대왕의 왕위 계승 과정을 보면 만약을 떠올리게 한다.

태종(이방원)의 셋째 아들인 세종(충녕대군)은 그 당시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였다. 그에겐 첫째 형 양녕대군과 둘째 형 효령대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장자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는 조선시대에서 살아있는 형을 제치고 왕위를 물려받는 건 그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종의 첫째는 친척들이 자신의 아버지 손에 죽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왕권 계승에 관심을 두기보단 여색을 즐기기에 바빴고, 둘째 효령대군은 유교사회에서 불교에 심취해 있어 왕위 계승을 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자연스레 책벌레였던 충년대군에게 왕위가 계승된 것이다.

의아한 건 권력욕이 그리도 강했던 태종이 살아생전에 스스로 세종에게 왕권을 넘겨주었다 하니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종처럼 애민을 강조했던 왕이 있었을까?

책을 너무 가까이하느라 시력을 잃고, 그에게도 감추고 싶은 가족사도 있고, 신하들의 사직서를 수차례 반려하며 나라살림을 책임졌던 조선시대 유일하게 대왕이라 불리는 충녕대군 세종.

그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며 가장 가슴 깊이 기억해야 할 왕이 아닐까.  


4. 세도정치의 시작, 안동 김씨.

난 김씨 집안의 사람은 아니지만 안동 김씨에서 파생된 성을 가진 사람이다. 지금이야 이런 것들을 따지지 않지만 옛날 어르신들은 약주를 하시면 자신의 족보에 대해 그리고 나의 족보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우리 조상님은 선비집안사람이고... 너희 몇 대손 할아버지가 어떻고..'

살아가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족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생각하게 됐다.

조선의 국력이 쇄하기 시작한 때는 정조 이후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제 23대 순조 때부터이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에 어린 나이의 순조 대신 그의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했고, 정조가 만들어 놓은 모든 기틀을 다 원점으로 돌려 논다.


한편 정조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영조를 왕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김창집의 후손인 김조순네 여식을 자신의 며느리로 받아들이며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김조순의 아들들이 순조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휘두르고 다니며 끝내 홍경래의 난이 발생되는 배경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조상님의 업적을.. 뼈대 있는 집안에 대해 흐릿하게 말씀하신 웃어르신들은 이런 내용을 알고 계셨을까?

만일 모르고 계셨다면 전래동화처럼 구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어르신들의 그 이야기에 조목조목 이야기를 따져 물었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지금은 내게 안동 김씨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실 어르신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별 의미 없는 생각이지만 나중에 내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는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5. 고려-조선-대한제국으로 나라의 이름은 왜 바꿔야 했을까?

왜 우리는 같은 땅 아래 다양한 국가의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먼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게 되는 가장 큰 사건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었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과 이성계는 절친했지만 요동정벌과 관련해 서로 극렬한 의견 대립이 있었고 이성계는 최영에 칼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권을 잡게 되지만 그 당시 '명분'이란 것이 매우 중요했기에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가 고려라는 나라의 왕을 맡기에 무리가 있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모시긴 했지만 결국 그는 조선이란 새로운 나라의 1대 왕이 된 것이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게 된 것은 국력이 쇠락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국호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은 44년간이나 조선을 다스렸지만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힘 한번 제대로 펼치지 못한 유악한 왕이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국력을 키웠더라면 현재의 국호는 조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19번째 대통령 체제하에 어려운 위기들을 마주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논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력을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한 것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잊지 않아야 하겠다.




이제는 역사의 연표를 외우고 어떤 왕 다음에 어떤 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나와 같은 30대가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건, 찬란했던 그리고 슬펐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고 깨어있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그것이 투표가 될 수 도 있고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지만)을 하는데 있어 조금은 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나라를 잃어본 적이 없는 지금의 우리는 나라를 빼앗겨본 경험이 있는 어른들의 말을 100% 공감하지 못한다.

나라를 잃어본 어른들은 나라보다 당장의 현실이 더 시급한 젊은이들의 행동을 100% 다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의 시대가 달랐기에...

서로가 마주한 상황이 다르기에...

우리는 세대별 생각의 차이가 극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다음에 공부해야 할 파트는 한국사에 가장 아픈 시대였던 근현대사이다. 이 파트를 공부하다 보면 난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의 그 차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길 바라며.

조선시대 역사공부를 마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