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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주로가 있는 밤 Sep 04. 2022

날씨가 안 좋을수록 출근해야합니다

공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밖에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이런 날에는 역시 비 내리는 리듬에 맞춘 김치전과 냉동실에서 방금 꺼낸 시원한 맥주가 생각납니다. 제습 모드로 에어컨도 적절하게 켜져 있겠다. 아내와 짠을 하고 눈을 감고 첫 모금을 들이켜려는 바로 그 순간, 무전기에서 나를 찾는 호출부호가 들립니다.


토목 00호, 토목 00호


깊은 한숨을-물론 같이 근무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 속으로만 쉽시다-깊게 쉬고 무전을 회신받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왜 이렇게 재난상황은 많고, 태풍이 오기 전부터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가 위의 생각 이미 답을 찾았습니다.


그게 내 일이니까. 이런 말을 할 때에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나름의 비장함도 담겨야 하지만, 저는 사근사근 그러나 똑똑하게 말해보겠습니다. 공항은 당연하지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강수로 인한 지연, 제설작업으로 인한 지연 등 수많은 지연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지연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불편합니다. 간단히 비행기 1대당 300분씩 타게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면 매 1분당 300분의 짜증을 덜 수 있습니다. 래서 낮이고 밤이고 비가 많이 오면 먼저 나와 자리를 지킵니다. 태풍을 대비하라는 문자를 받으시지 않나요? 그 보내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만, 우리도 그걸 보냅니다.


자리에 앉아 간단히 cctv로 확인하고 버튼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물이 잘 빠지도록 로봇들을 배치하면 됩니다.라고 상상하는 건 역시 2030년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로봇이라고 생각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매시간 비 때문에 침수가 발생할 수 있는 구역을 확인하고 펌프를 배치하고 사람과 차량의 출입을 통제합니다. 보통 아침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가 원칙이라 피곤함은 채 없어질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짬을 내서 먹는 라면이 참 맛있는 게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차분히 일회용 젓가락을 뜯습니다. 왜 새벽 2시 즈음이 되면 이렇게 라면이 생각나고 맛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김치는 없어도 빗소리를 음악 삼아 한두 젓가락 먹고, 국물까지 흡입합니다. 다 먹고 나면 그때부터 고비가 시작됩니다. 빗소리의 리듬에 맞춰 눈꺼풀은 왜 이렇게 무거운지 잠을 깨려고 이마를 짚어봅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공항 활주로에서 비를 바라봅니다.


물론, 야근수당을 줍니다. 한 달에 한 번 수당을 확인하고 역시 힘든 일은 돈으로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렇긴 하더라도, 아무래도 밤에 근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듯 비가 오는 날에는 잠을 깨기 위해 내 이마를 짚는 게 아니라, 아내 이불을 덮어주고 잠을 청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오늘도 나가야 하니 저녁을 일찍 먹고 집을 나가봐야겠네요. 모쪼록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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