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또는 아빠였을 것이다. 어른의 손을 잡고 절 같은 곳엘 들어갔다. 제사를 지내는지 과일과 선명한 분홍색의 동그란 사탕 등이 높은 재단 위에 더 높이 쌓여있었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기억’이다.
어느날 문득 이 장면이 떠올라 엄마께 여쭈었는데 내가 ‘두 살 때’ 있었던 일이라며 매우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 살 때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라 나 또한 놀랍긴 매한가지였는데, 그 장면 외에는 다른 무엇도 생각나지 않는 아주 단편적인 기억이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제사 지내러 갔던 길이라는 엄마의 말씀 덕분에 어렴풋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많은 걸 하고,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기억은 마치 모아놓은 천 조각처럼 크기도 형태도 색깔마저도 다양하다.
그중 선명하게 떠오르는 조각들이 있다.
발견하고는 동네 파출소에 가져갔던 일, 그때 문손잡이가 내 머리 위에 있었을 만큼 나는 아직 작았을 때다. 나 혼자 경찰서에 가지는 않았을 터, 경찰서에 가져가야 한다고 우겼을 텐데…….
한번은 누군가에게 안긴 채 크게 느껴지는 나무 대문 앞에 있었던 때로, 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엄마가 나를 받아 안으셨던 일이 떠오른다. 내가 집을 잃었을 때였다는 것을 훗날 엄마의 말씀으로 알게 되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앞서 걸으셨던 엄마의 모습, 엄마의 셔츠에 물 얼룩이 졌던 기억, 그때 엄마가 나를 돌아보며 했던 말.
“일부러 물웅덩이를 찾아 걷는구나!”
새로 산 노란색 장화를 신은 나는 첨벙첨벙 즐거웠다.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는, 항상 책가방을 받아줬던 나의 엄마.
엄마는 책을 무척 좋아하셨다. 책을 읽기 위해 ‘친정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서울행 전철을 자주 이용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빠의 광산 사업이 시원찮아 친할머니댁에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진외증조할머니와 출가 전의 고모들까지 있는 시댁에서는 아무래도 책 읽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친정 다녀오겠다고 하면 할머니는 흔쾌히 허락했기에,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 나들이를 자주 했다. 지금과 달리 전철에서 간식 섭취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때라, 군것질거리가 잔뜩 담긴 검은 봉투를 들고 엄마는 책 여행을, 동생과 나는 전철 여행을 했다.
고작해야 4살쯤 되었을까. 외가댁에서 놀았던 기억은 없이 전철 안에서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무임 승차한 나와 동생은 빈자리가 많은 동인천역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엄마의 자리를 함께 사용했으니, 많이 크지 않았을 때가 분명하다. 엄마 등 뒤에 서서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았다. 휙휙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이, 자꾸만 바뀌는 창밖의 모습들이 재밌었다. 유리에 습기가 차는 계절이라도 되면 주먹 도장을 찍어 발바닥을 새겨 놓기도 하고, ‘동그라미, 동그라미, …… 육육은 육, 육육은 육, 백두산.’ 노래 따라 36번 곰돌이를 그리거나,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 아이구 무서워 해골바가지.’ 노래 따라 주먹 쥐고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면서도, 무섭지 않은 해골바가지 그림을 완성했다.
한 시간은 족히 넘게 걸렸을 전철 여행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어쩌면 신나게 놀다가도 까무룩 잠이 들어 엄마의 책 읽기를 방해했겠지만, 그것은 내 기억 밖의 일이다. 매일이 엄마와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유치원 대신 엄마의 보살핌 속에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가 찍어준 그날의 사진 덕분에 그때의 나를 볼 수 있다. 엄마가 잘라주신 바가지 머리를 하고서, 외할머니가 사주신 체크무늬 가방을 들고, 빨간색 모직 바지에 체크무늬 모직 자켓, 왼쪽 가슴팍엔 흰 손수건과 이름표를 옷핀으로 꽂아놓아 누가 뭐래도 초등학교 1학년생이다. 재밌는 건 분홍색 계열의 꽃무늬 롱 드레스를 입은 동생의 모습이다. 어쩌자고 엄마는 동생에게 롱 드레스를 입혔을까.
보석 같은 시간이었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 복이 많아 선생님들의 예쁨을 많이 받으며 6년 내내 행복했다.
그땐 ‘가정방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가을 혹은 겨울의 초입이었을까. 트렌치코트를 입은 1학년 때 담임선생님(윤대웅 선생님)이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여섯 살이던 동생이 “따뜻한 데 앉으세요”라고 말해 모두가 웃었던 환한 기억에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뺨 맞은 기억도 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빠르게 달려 운동장의 그네에 앉았는데, 알지도 못하는 남자아이가 다가오더니 내 뺨을 때리고 그네를 차지했다. 이후 내가 울었는지 선생님께 일러바쳤는지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 순간 느꼈던 당혹감은 꽤 오래 지속되었던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이쁨받던 나의 뺨을 때렸으니 그 남자아이가 꾸중 정도는 듣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2, 3학년 때는 같은 선생님(구금서 선생님)이었는데 비쩍 마른 몸에 어깨가 구부정한 모습이었다. 어느 비 내리던 날 오후, 내가 3학년이고 동생이 1학년이라고 짐작되는 하교 시간. 운동장의 흙탕물이 튈까 봐 동생의 바지를 걷어주셨던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 다정한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걱거리는 갱지 위에 멋진 필체가 선명한 선생님의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다시 읽게 된 어느 날이다.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수소문한 끝에 연락이 닿았고 그립던 선생님을 만났다. 비록 나를 기억하고 계시지는 않았지만, 마주 앉아 그때의 일들을 회상할 수 있음이 좋았고, 감사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전학을 갔다. 집에서의 거리는 두 학교 모두 비슷했지만, 큰길을 건너야 하는 동선이 마음에 걸렸던 엄마는 지하상가를 이용해 길을 건너면 되는 초등학교로, 나와 동생을 전학시켰다. 전학 가기 전날, 50명이 넘는 아이들 소리로 소란스러웠을 교실에서 전학서류가 담긴 서류 봉투를 건네주시던 선생님(박헌근 선생님)은 “이거 그냥 찢고 내일 와도 돼. 알았지?”라는 말로 전학 보내기 싫은 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난 엄마의 뜻에 따라 전학을 갔고, 낯선 학교에서 시험을 곧잘 봐 선생님의 눈에 드는 학생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고적대 활동도 했는데, 어쩐 일인지 그때의 선생님 성함만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고적대 활동을 했던 것만은 강하게 남아있다. 빳빳하게 다림질되어 있던 흰색 주름 스커트에 빨간색 상의의 제복을 입고, 노란색 깃털이 풍성하게 달린 빨간 원통형의 모자를 썼다. 처음엔 멜로디언을 불다가 작은북을 쳤는데 복장을 갖추어 입고 운동장을 행진할 때면 어깨가 으쓱한 게 기분 좋았다.
전학의 스트레스는 꽤 크다고 알려졌지만, 나는 무난하게 4학년을 마치고 새 학년을 맞이했다. 나의 전성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친구들의 표현에 의하면 주류에 속하던 때로 5, 6학년 때다. 선생님과 친구들 바뀜 없이 모두 그대로 2년을 함께했는데, 새로 부임해 오신 선생님(한영애 선생님)께서는 초등학교 생활을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셨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때 반 아이들의 이름과 번호를 기억하고 계신 것으로 보아, 매우 각별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 친구들끼리도 친분이 매우 두터워 학기 중이면 학기 중인 대로, 방학이면 방학인 대로 모든 날이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반면 두 살 터울의 동생과는 참 많이 싸웠다. 주로 놀다가 싸웠다 싶은데, 그럴 때면 아빠에게 불려 가 대령해 있는 회초리에 종아리를 내줘야 했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냅다 줄행랑치는 동생과 달리,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비는 일이 없었다. 결국 아빠의 회초리는 내 종아리만 아프게 하고 동생은 불러 세우지도 않으셨다. 이런 억울할 때가 다 있나……. 하지만 난 묵묵히 그 상황들을 받아들였고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 엄마는 회초리 자국이 선명한 자리에 부드럽게 약을 발라주며, 미련하게 그걸 다 맞고 있냐고, 동생처럼 도망갔어야 했다고, 좀 약게 굴어도 된다고 했다.
고집 센 아이, 미련한 아이, 순한 아이. 그렇지만 할머니 표현에 의하면 싹수가 있는 아이였다.
너른 마당 위, 빨랫줄에 걸린 축 처진 양말들이 쪼르르 기지개를 켜면 엄마에게 달려가 걷어달라고 떼를 썼다. 대청마루에 빨랫줄에서 걷어 놓은 빨래가 쌓이면 양말을 골라 차곡차곡 반듯하게 개켜놓았는데, 그 모습을 보신 할머니가 ‘손끝이 야무지다’고 칭찬하며 ‘싹수가 있는 계집애구나’ 하셨단다.
지금도 설거지는 싫어 개수대 가득 쌓아놓기 일쑤지만 빨래 개키는 일은 좋다. 뽀송해진 빨래를 개켜놓을 때면 그 시절의 햇살 냄새 같은 게 난다고 할까. 그건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엄마와 나 사이에 흐르던 공기다.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길이고 고개를 한껏 들어 올린 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건 엄마와의 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