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자율화가 시작된 1983년, 걸어 다녔던 초등학생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중학생이 되었다. 정류장에는 남녀 학생들로 북적였고, 등교 시간이 임박해지면 버스 안은 콩나물시루가 되기 일쑤였다. 그 버스가 급정거라도 하는 날엔 이리저리 쏠리는 아이들과 부러 더 미는 아이들로 버스 안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뒤엉켜 소란했다. 그러고 나서 교실에 들어가면 “얘 말이야, 또는 내가 오늘 버스에서”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매일매일 새로운 소식으로 끊이지 않았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무릎길이의 주름치마에 마의라 불렀던 재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나는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모범생이었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내가 그린 포스터나 표어는 늘 교실 뒤와 복도에 걸렸고, 교내 대표로 단상 위에 올라가 상장도 여러 번 받았다. 당연히 미화부장은 늘 내 몫. 자연스럽게 미술과 관련한 진로를 생각했던 나는 미술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정보에 따라 미술관 나들이를 즐겼고, 그때 본 샤갈 전시회는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여학생만 50명이 넘었던 학급에서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모여 노는 재미가 컸다. 롤라 스케이트장과 분식집 나들이가 전부였던 그 시절, 힘들었던 기억은 없이 웃음소리만 한바탕이다. 그러고 보니 쏟아지는 졸음을 주최할 수 없었던 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바로 ‘국어 시간’이었는데, 선생님께 ‘인간수면제’라는 별명이 있었던 걸로 보아 나만 졸렸던 건 아니었나 보다.
이렇다 할 이슈 없이 무난한 1학년과 2학년을 보내고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작은 모험이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불새 회원’이었다. 명함 크기의 누런 종이에 손글씨가 선명했던 10명의 명단 위에는 더 선명한 볼드체로 ‘불새’라고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합의하에 지었는지 회원 중 한 명이 독단적으로 지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윤정’이라는 친구가 나눠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색깔도 없이 연필 하나로만 쓴 그것을 공평하게 받은 우리는, 고무줄놀이로 뭉쳐진 같은 반 친구들이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동그랗게 묶은 검은색 기다란 고무줄을 갖고 화장실로 향했다. 신설 학교라 화장실이 매우 깨끗하고 넓었던 그곳에 모여 술래를 기억해서는, 이전 쉬는 시간에 이어 ‘고무줄놀이’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문제가 생겼다. 자율학습 시간에 불새 회원 10명 중 눈짓과 고갯짓으로 합의된 7명이 고무줄을 갖고 화장실로 향했는데, 하필이면 순찰 중이던 선생님께 걸려 교무실로 불려 간 것이다. 나를 포함한 3명은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불려 가지 않았지만,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교무실로 가 이실직고했다. 우리도 ‘불새 회원’이라고. 같이 ‘고무줄을 하는 멤버’라고.
선생님은 10명을 쪼르르 세워놓고 반성문 쓰기를 벌로 내리셨다. 무려 한 달 동안이나.
“하고많은 곳 중에 왜 하필 화장실에서 고무줄놀이냐”고 물으셨는데, 쉬는 시간 10분 동안 운동장까지 가기는 시간이 짧았고, 하필이면 화장실이 너무나 깨끗하고 넓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들의 행동이 너무 귀여워 그런 벌을 내리셨던 건 아닐까 싶다.
이후로 우린 학교 다니는 내내 ‘올림픽 꿈나무’로 불렸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때라 종목엔 없는 올림픽 꿈나무. 그러고 보니 ‘불새’는 내 중학교 시절의 상징 같은 이름이다.
생생한 추억 하나를 남기고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렴풋하게 정해놓은 진로는 명확해져서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특별활동도 미술부를 지원했다. 특히나 미술 선생님까지 좋아했으니 안 그래도 좋은 미술 시간이 더 좋았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 친구들은 미술 선생님이 지나가시기라도 하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기어이 선생님이 돌아보시도록 했다. 어디에서건.
미술 전공이라 야간 자율학습을 했던 날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지만, 간혹 늦은 밤까지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할 때면 친구들은 무서운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중 가장 무서웠던 얘기는, 2층 이상의 창밖에서 길을 묻는 ‘할머니 귀신’ 이야기와 물구나무를 선 채 머리로 ‘콩콩콩’ 다니면서 교실 책상 밑에 숨어있는 학생을 찾는다는 ‘콩콩 귀신’ 얘기였다. 그런 날이면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온 아빠 팔짱을 끼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겁 많던 고등학교 시절 중 고3이 되었을 무렵, 조금은 낯선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일명 ‘노는 애’가 우리 반에 있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나를 불러냈다. 나는 공부에 취미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고 여지없이 모범적인 아이로, ‘노는 아이’와는 말 한마디 섞는 일이 없었다. 그런 아이들은 모범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면도칼을 씹는다는 등의 말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서워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한 채 그 아이 앞에 마주 섰는데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미팅을 나갔는데 네 이름이 너무 예뻐서 내 이름을 ‘시연’이라고 했어. 미안해.”
내 이름이 예쁘다고 해서 좋았나, 아니면 겁을 먹었는데 큰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괜찮다고 말하고는 주위 친구들과 어색하게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던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정말로 면도칼을 씹는지 물어볼 것을, 이제 와 소문의 진상이 궁금하다.
별일 아닌, 이처럼 낯선 경험들이 채워졌던 고3 시절은 밋밋했던 일상에 소소한 재미가 더해져 생기가 느껴진다.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 덕분에 비가 내리는 수요일이면 빨간색 장미를 받았던 아름다운 기억도 있고, 헛웃음부터 나오는 단짝 친구와의 약속도 생각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50평 아파트를 얻어서 살자고 했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긴 그런 약속을 그때가 아니면 또 언제 했을까도 싶다. 그렇게 철모를 때가 그립기도 하고.
돌이켜보니 ‘조금은 밉상이었겠다’ 싶은 내가 생각나기도 한다. 미술학원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다. 그림을 그리다가 출출해지면 붓 손잡이를 젓가락 삼아 남학생 여학생 구분 없이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한 냄비에 젓가락이 드나드는 게 나는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비위생적으로 느꼈던 나는 처음 한 젓가락만 먹고 물러났는데, 언제부턴가 냄비뚜껑인지 컵인지 내가 먼저 덜어내고 나서야 다들 먹기 시작했다. 배려였더라도 누군가는 그런 내가 참 밉지 않았을까.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은 대학 순회’를 했다. 사복을 입었던 것으로 보아 방학 또는 주말로 짐작되는데, 안타깝게도 순회했던 대학엔 아무도 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기필코 가고야 말겠다’며 재수를 선택한 친구와 달리,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담임 선생님께서는 재수를 권하셨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나에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원하는 학과’였고, 하루라도 빨리 대학생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교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비록 원하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처럼 날마다 즐거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캠퍼스의 낯선 풍경만으로도 두근거렸던 첫날, ‘대학 가면 누구나 연애를 한다’는 출처 모를 이야기로 설렘을 품은 채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노래를 너무나 잘 불렀던 같은 과 동기에게 반해 한동안 그 친구를 보는 재미로 등교했다. 1학년 내내 좋아했던 것 같은데 같은 무리로 다니기만 했지, 연애는 무슨. 짝사랑으로 끝났다. 그 와중에 소개팅을 몇 번 했는데 나와는 멀어도 너무 먼 얘기였다. 고등학교 동문 선배의 소개로 카페에서 만난 남자는 일어나는 순간, 작은 키에 실망해 그대로 집으로 왔다. 한번은 나를 소개받고 싶어 하던 이과생과 소개팅을 했는데, 세 번째 만남에 『어린왕자』 책을 선물하면서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남긴 채 헤어짐을 강요했다.
아무래도 나는 연애할 준비가 안 되었던 것 같다.
복학한 선배들은 “언니 따라 온 줄 알았다”며 같은 강의실에 있는 나를 어린아이 취급했고, “천연기념물이라 보호해야 한다”는 농담도 했지만 괜찮았다. 돌이켜보니 여성성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연애보다는 이성의 동기나 선배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학년마다, 심지어 학기마다 연애 상대가 바뀌는 동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하냐”고 볼멘소리를 하고는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으니, 집에 있는 여동생 같다는 말이 차라리 편했다.
나는 그냥 여동생이었고 친구였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 연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나를 이성으로 좋아했던 친구도 더러 있긴 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내게 매일 ‘가나 초콜릿’ 제일 큰 것을 사다 준 동기도 있었고, 만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장미꽃 한 다발을 전해준 동기도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같지 않았기에, 모르는 체했기에, 우리는 4년 내내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편지쓰기를 좋아해서 군대 간 동기들 모두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남자 동기 모두가 나에게 편지 받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안심인지, 실망인지 모를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나 시연이한테 편지 받았어!”
“나도”
“나도”
꿈꿨던 연애도 없었고, 그 흔한 단체 미팅도 없었지만, 그 시절 나는 충분히 나로서 반짝였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맘때의 나를 떠올리면 입꼬리가 먼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