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대로 보고 싶었다

그여자가 쓰는 그남자 그여자 #1

by 시연


2007년 8월 2일은 그 남자를 처음 만난 날이다. 친절한 말투와 조용한 목소리는 심장에 닿아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책을 사러 갔던 첫번 째 방문 이후에는 거의 출근하다시피 그곳엘 갔고, 친구들은 매일 내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어땠는지' 물었다.




처음 방문은 친구(친구의 아이들 포함)와 함께였다. 내가 다니는 헌책방엘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8월 2일까지 쉽니다'라는 안내문구와 함께 굳게 닫힌 문이 우리를 맞이했다. 친구를 그냥 보내기

아쉬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조금은 규모가 있어 보이는 헌책방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헌책방 주인은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했고, 책과 책 사이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내뱉는 언어는 따뜻했고, 목소리에는 착함이 묻어났다. 그런 책방지기 덕분인지 낯선 공간이 불편하지 않았다. 켜켜이 쌓여있는 책과,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는 책장 안에서 헌책방만 가면 찾는 <솔바람 물결소리>와 모으고 있던 <키다리 아저씨>가 있는지 천천히 살폈다.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기에 책방지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안타깝게도 그곳엔 없었다. 빈손으로 나오기 아쉬워 몇 권을 골라 값을 지불하고 나오는데, 묶여있는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이 맘에 들어 값을 물으니, 아직 값을 매기지 않아 지금은 판매할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월요일에 오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2007.08.02. 한미서점에서 처음 구매한 책


책방지기인 그 남자의 매력에 빠졌다고 해야 하나? 난 친절함을 이야기했고 같이 갔던 친구는 인상도 좋다며 맞장구를 치면서 또 다른 친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 오늘 이상형 만났어!


이상형을 만났다는 말에 친구는 눈이 동그래지며 이어서 나올 나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어디서? 이름은? 키는 커? 뭐하는 사람인데?" 듣는 내가 다 숨이 찼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수많은 소개팅을 하면서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며 퇴짜를 놓기가 일쑤였으니, 그간의 나를 지켜보던 친구가 이렇게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헌책방에서 만났어." 그곳의 손님이냐 묻는 친구에게 주인인 것 같다고 했더니 잔뜩 당겨 앉았던 몸을 의자 등받이까지 밀어 앉으며 "그래서 먹고는 산대?" 초를 친다.


주말을 보내고 환한 월요일이 되었다. 갈까 말까~ 괜히 나 혼자 설레어서는 고민했다. "책 사러 가는 건데 뭐~" 묻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을 하고 어느새 서점 안이다. 값이 매겨진 동화책 2권을 골라 값을 치르는데 '키다리 아저씨'를 꺼내 준다.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어!!!' 이놈의 설렘 작동. 콩닥콩닥콩닥.


동화책을 구매하는 나를 보며 아이가 있는지, 결혼을 했는지 내 신상을 물었지만, 난 그 남자의 신상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는 사장님은 결혼하셨어요?' 이상하지 않은가. 손을 보니 반지는 끼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기혼자라고 모두 반지를 끼고 다니지는 않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


'혹시 바람둥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그 남자의 행동과 말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맘에 드는 사람이 생겼는데 헌책방 주인이라고. 나의 결혼 여부를 물어봤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기혼자인지 미혼자인지 모르겠다고. 반지는 끼고 있지 않았는데 블라블라 블라~~~. 난 이런 궁금한 내용을 남자 선배에게 물었다. 그 남자가 바람둥이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내게 관심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아무리 바람둥이라도 관심 없는 사람에게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게 결혼한 선배의 대답이다.


이후 난, 출근하다시피 그곳엘 갔고 '이 여자는 책은 안 보고 사기만 하나?' 내 마음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대학 교재를 가져가 판매 하기도 했다.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그 남자는 늘 거기 있기에 번거롭지 않아 좋았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묻지 않아 그랬나, '늦은 나이임에도 결혼하지 않는것이 부모님께는 큰 걱정'이라며 본인이 미혼임을 슬쩍 드러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묻는다.


영화 좋아하세요? 영화 보실래요?


'이것이 데이트 신청인가?' "네! 좋아해요." 영화 좋아한다고 까지는 해 놓고 어쩌다 헌책방 운영에 대한 이야기로 빠져 영화를 보려면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입으로는 헌책방 얘길 하고 있었지만 마음과 머릿속은 영화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아..... 어떻게 영화 얘기로 돌아가지?' 눈 질끈 감고 내뱉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일찍 끝나는 날 영화 봐요~ " 서점을 나오며 뒤통수가 민망했지만 그렇게 말한 나의 용기에 박수를 쳤다. "잘했어~ 시연!!!" 그것이 여섯 번째 만남이었다.


며칠 후, 그 남자를 보기 위해 다시 한미서점으로 갔다. 그런데 심장이 마구 요동을 쳐서 서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람의 심장이 그렇게 뛸 수 있다는 것이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마치, 가슴에 붙었다가 등에 붙었다가 또다시 가슴에 붙었다가....... 쿵! 쾅! 쿵! 쾅! 결국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돈 후에야 서점으로 들어갔다. 나의 이 떨림을 눈치채지 못한 그 남자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느냐 물었고, 정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난, 시네큐브에서 상영하는 "애프터 미드나잇"을 보자고 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집으로 오는 길, 별다른 이야기도 없었다.



그 남자와 처음 본 영화



한편, 친구들은 하루 걸러 한 번씩 내게 전화를 걸어왔고 난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이미 결혼 10년 차 친구는 나의 연애담 덕분에 설렌다며 "내가 이혼을 생각할 때 너는 사랑을 하는구나~" 라고 말했다. 이혼이라는 단어에 놀라 물으니, 결혼 10년 쯤 되면 누구나 이혼을 한번쯤 생각한다나? 그럼 결혼을 왜 하느냐고 반문했지만 뾰족한 대답은 없었다.


또 한 친구는 그랬다. 둘 다 어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들 아니냐고, 열 번을 만나도록, 영화를 함께 보도록, 이름도 성도 모르고, 아는 것이 도대체 뭐냐며.......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서점 주인인지 점원인지, 학력은 어떻게 되는지 한심하기가 그지없다고 했다. '그런가?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동네 극장에서 두 번째 영화를 봤다. 오늘은 기필코 이름을 물어보리라 다짐했는데 영화가 너무 슬퍼서 엉엉 울다가 그대로 헤어져 집으로 들어왔다. 대신 휴대폰 문자를 활용했다. "잘 들어가셨어요? 그나저나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대답이 없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나 혼자 설레었던 건가? 시무룩한 마음은 다음날도 이어져 뭐라도 해야 했다. 그때 보인 뿌연 유리창을 맑게 청소하고 거실 바닥에 大자로 누워있는데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린다. 뾰롱, 뾰롱, 뾰롱!


'어제 문자를 보냈는데 가지 않은 것 같아 다시 보냅니다. 제 이름은 ***입니다. 이름을 묻거나 알리지 않은 이유는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각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름을 묻거나 알리지 않은 이유는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각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람, 어쩌면 나와 많이 닮은 사람이구나...'


어떻게 알았는지 둘 다 모자란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난 그 남자의 문자를 그대로 읽어줬다. "뭐라고?" 도대체 뭔 소리냐는 말투다. 더 이상 네게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서점으로 달려갔다.


보이는 그대로 보고 싶었다. 내게 전해지는 느낌 그대로 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는 데 특별한 배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말투나 사용하는 언어를 보아도 '설마~ 중졸은 아니겠지?'

그날의 문자는 우리의 만남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