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2025) 해석/감상
‘프랑켄슈타인’은 드라큘라와 함께 고딕 호러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특히 영화 산업에 있어서 프랑켄슈타인은 보리스 칼로프의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통해 대중문화에 깊숙이 각인된 콘텐츠이다. 지금까지 프랑켄슈타인은 수많은 각색이 이뤄졌으나, 메리 셸리 원작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1995년 케네스 브레너 감독/주연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프랑켄슈타인의 순수한 탐구열이 빚어낸 이카루스의 비극을 섬세하게 다루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케네스 브레너 작품의 완벽한 고증보다는 심도 있는 자신만의 비전을 투영한다. 델 토로는 금기를 넘어선 창조 행위를 뒤틀린 인간의 심리와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고전을 존중하면서도 현대 관객에게 어필할 만한 복합적인 심리 드라마를 보여준다.
델 토로 버전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은 케네스 브레너 버전의 순수한 과학자와 거리가 멀며, 교만하며 파괴적인 악인으로 보인다.
그의 성격적 결함은 통제된 환경, 가혹한 훈육,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다. 빅터는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으나, 그와 교류하는 사람들은 친구가 아닌 시종들 뿐이었다. 오직 그의 어머니만이 진정 마음을 나눌 상대였으나, 그녀의 죽음 이후 빅터는 죽음을 통제하려는 강박이 생긴다. 또한, 빅터의 아버지는 감정적 교류 없이 냉정한 이성과 합리만을 중시하는 가혹한 훈육으로 그의 비정한 내면을 형성시켰다. 빅터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나르시시스트적 지배욕을 가진 인물이 되며, 그에게 '생명 창조'는 통제불가한 '죽음'을 자신의 능력 아래 두려는 도전이다.
빅터가 성인이 된 후 등장하는 학회 청문회 시퀀스는 그의 뒤틀린 인간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빅터는 시체를 조합한 프로토타입에 전기를 주입하여 되살리며 청중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학회의 권위자들이 보기엔 그것은 윤리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괴기한 '프릭쇼'일 뿐이었다. 논쟁이 과열되자, 분노에 찬 빅터는 프로토타입에 꽂혀있던 전기침을 가차 없이 빼버리고, 피조물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다시 죽음을 맞는다. 이런 빅터의 행위는 창조자가 피조물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도구로만 여길 뿐, 책임, 연민, 공감 등의 도덕적 의무가 결여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이후 벌어지게 될 비극의 서막이 된다.
하인리히(크리스토퍼 발츠)는 빅터의 실험에 흥미를 보이며 그의 후원자가 되길 자청한다. 이때, 그는 유리건판 방식의 사진기를 다루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하인리히의 캐릭터와 빅터 프랑켄슈타인 과의 관계, 그리고 시대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유리건판 방식의 카메라와 1855년이란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하인리히의 카메라는 다게르 타입으로 추측된다. 다게르 타입은 초창기 사진기의 대표적인 카메라이다. 사진의 등장은 신의 선사한 천부적 재능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예술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린 계기였다. 카메라는 19세기 산업기술혁명의 상징이자 신의 자리를 대체한 인간의 이성을 상징한다.
사진술은 또한 현실을 정확히 복제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이는 생명 자체를 복제하고 통제하려는 빅터의 시도와 일치하며, 하인리히가 빅터와 운명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이 된다.
한편, 하인리히가 촬영하는 소재 역시 주목해 볼 만하다. 그가 찍는 사진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회화 장르인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의 모방이다. 실제로 초창기 사진작가들은 화가들이 전직한 경우가 많았으며, 사진 인화를 위하여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물화 모방작이 흔했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해골(죽음)과 꽃(아름다움), 과일(생명)을 병치하며,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메시지를 전한다. 즉, 세속적인 지식과 명예는 죽음 앞에서 공허하다는 경고다. 이는 죽음을 극복하려 했던 빅터의 오만이 결국 삶을 수렁에 빠뜨렸음을 암시하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된다.
빅터가 창조한 괴물은 메멘토 모리의 비극적 실체이다. 괴물은 재생가능한 육체 덕분에 죽음을 모르는 불멸의 삶을 산다. 하지만 괴물은 시체로부터 태어났기에 그의 외모는 사람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배척당하게 된다. 때문에 불멸의 삶은 오히려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된 저주가 된다. 죽음을 알지 못하나 늘 죽음과 함께하는 이 역설적 존재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미덕을 잃으면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지는 메멘토 모리의 진리를 증명한다.
한편, 엘리자베스(미아 고스)는 이러한 이성 만능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도덕적 척도이다. 그녀의 첫 등장은 바니타스 작품의 오브제인 해골을 손에 들고 나타나는데, 이는 그녀 자체가 해골의 대조로써 아름다움과 생명의 오브제처럼 기능한다.
그녀는 빅터가 상실한 마리아적 존재를 대체할 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빅터가 대변하는 냉소적인 이성에 반해 자연과 순수한 가치에 대한 이상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그와 반목한다. 엘리자베스는 괴물에게 유일하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인물이며, 이는 그녀가 메멘토 모리의 역설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역할임을 보여준다.
영화 말미, 빅터는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목전에 두어서야 비로소 삶의 가치를 완성시키는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다.
이성의 신봉자였던 빅터는 괴물의 지능을 탓하며 그를 실패작으로 취급했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처럼 실패의 원인이 기술적 결함이 아닌 사랑과 공감의 결핍이었음을 인정한다. 이는 빅터가 아버지로부터 냉정한 이성만을 훈육받았듯이, 그가 피조물에게 사랑이 결핍된 생명을 대물림한 결과였다. 즉, 이 대물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단절성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이기도 하며, 감정적 교류가 결핍된 부자 관계의 유사성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빅터는 유일하게 남은 자기 것인 괴물에게 용서를 빌며 그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이는 빅터 자기 자신의 결핍된 삶을 향한 화해이기도 하다. 비로소 창조주와 피조물은 진짜 아버지와 아들의 유대로 거듭난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세상에 선보인 1818년은 산업혁명의 정점에 있던 시기였다. 그녀는 오이디푸스와 이카루스의 비극을 변주한 듯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이성이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던 시대에 반기를 들 듯 강한 의문을 던졌다. 한때 이성이 인간다움의 척도로 여겨진 때가 있었으나, 감정적 인간성을 배제된 탐구의 결과가 결국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는가? 왜 이 세상은 끊임없이 비극이 발생하는가? 이는 고대부터 인간이 끊임없이 던져온 질문이다.
델 토로는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에서 신과 인간의 반목을 재차 질문하며,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로써 메멘토 모리를 다시 상기시킨다. 영원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유한함은 비극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가치를 만들고 아름다움을 만드는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는 언제나 비극을 슬퍼하면서도 늘 매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과 생명,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이 세상의 역설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본능이 있기 때문 아닐까? 마치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