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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날 May 21. 2023

라일락 향기와 5월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바람을 타고 코 끝을 스쳐 지나가는 진한 라일락 향기를 만났다. 5월이구나. 라일락 향기에 떠올려보게 되는 순수했을 나의 여고시절, 5월이 오면 라일락 향기로 그 시절의 시간을 기억해낸다.


2023년 5월 15일,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수녀님께 정말 오래간만에 전화를 드렸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신기하게도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 그대로다.

"잘 지냈니?"

"너무 반갑다."

"나도 가끔 니가 생각이 났는데, 근무지 이동도 있었고 좀 정신이 없었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구나 했다."

아주 어릴 적 품에 안겨 인사를 나눈 딸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고 말씀 드리니, 너도 많이 변했겠구나라고 하신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게 벌써 27년,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얼굴을 뵌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작가 체호프를 사랑했던 아뷔로 부인이 기차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기차가 체호프의 집앞을 지나게 되자 그녀는 불현듯 그가 그리워졌습니다. 가까운 역에 다다르자 부인은 간단한 편지를 써서 심부름꾼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은전 한닢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받아든 체호프는 편지 사연을 읽으려고 애써 보았으나 심부름꾼의 손때와 땀에 젖어 버려서 겨우 아뷔로란 서명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심부름꾼이 대가로 받았던 은전 한닢을 내놓으려고 하자 체호프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필요없네. 그녀의 이름만 보아도 충분하니까."


내가 학창시절을 보낸 고등학교에는 넓은 운동장 한켠에 라일락 덩쿨이 가득한 등나무 벤치와 작은 연못이 있었다. 라일락이 활짝 피기 시작하는 5월이면 아이들의 웃음 소리에도 진한 라일락 향기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 만난 수녀님은 우리 반 아이들과 교환일기를 쓰셨는데, 처음 써보는 교환일기는 책의 좋은 문장들을 찾아 필사하게 했고,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장이 되기도 했다.


"수녀님은 '만남'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단다. 그냥 만남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만남'을 어쩌면 이 노트는 어린왕자와 여우와의 관계가 될지도 모르겠네. 어린왕자와 여우는 서로를 알기 위해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갔고, 그러는 사이에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지.(1996.03.26)"


27년 전에 썼던 노트를 다시 펼쳤는데, 역시나 18살에 느꼈던 감정은 얼마나 오글거리는지 아무래도 이 노트는 혼자서만 봐야 할 것 같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라고 해주셨던 선생님 덕분에 한 권의 노트에 아주 많은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친구들과 주고 받았던 롤링페이퍼부터, 18살의 내가 30살의 나에게 쓴 편지까지, 그때의 감정들을 기록으로 읽어 내게 되는 흔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선생님은 희망을 가져보고 싶다.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고 서로의 불신 속에서 정서적 균형을 잃고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내가 만났던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 어디엔가 삶의 아름다운 씨가 자라고 있음을 믿고 싶다. 보이지는 않지만 '진솔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있음을... (1996.11.08)"


중국 유학시절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책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은 힘든 시간을 겪으면서 마음의 위로가 되었고, 응원이 되어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근무지 이동이 많은 수녀님을 만나 뵙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1년에 2~3번 정도 좋아하는 책 몇권과 편지로 소식을 전하면서 지냈는데, 코로나 이후로 한참을 연락을 못드렸던터라 오늘 전화 통화는 유난히 반갑고, 마음이 좋았다. 긴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보고 싶고,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고, 추억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다는 건 나에겐 또 하나의 자랑이기도 했고, 아직도 나의 안녕을 응원해주는 선생님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기도 하다.   


스승의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수녀님과 나의 여고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선생님이 꼭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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