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스즈키 유이

by 잌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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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1초 만에 수십 페이지의 그럴듯한 텍스트를 생성해내고, 정교한 딥페이크 기술이 눈앞의 현실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시대다.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해야 하는 피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혼란 속에서 현대인이 선택한 가장 손쉬운 생존 전략은 바로 ‘권위’에 기대어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무명의 누군가가 쓴 통찰력 있는 글은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치부되지만, 일론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의 사진 옆에 적힌 출처 불명의 문장은 순식간에 수만 번 공유되며 시대의 금언(金言)으로 추앙받는다. 팩트(Fact)보다 임팩트(Impact)가 중요해진 세상, 매스 미디어와 알고리즘은 유명인의 권위를 훔쳐 대중을 선동하고,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로 둔갑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2025년 서점가를 강타한 스즈키 유이의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바로 이 지점, 우리가 맹신하는 ‘지식의 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모래성 위에 지어졌는지를 통렬하게 조롱하는 블랙 코미디이자, 텍스트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스릴러다.


소설은 괴테 연구자인 주인공 도이치가 우연히 홍차 티백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문장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도이치는 이 문장에 깊은 감명을 받지만, 동시에 불안에 휩싸인다. 이 문장이 정말 대문호 괴테의 말인지, 아니면 상술에 능한 카피라이터의 창작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이치의 집착은 단순히 문헌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흔든 그 문장의 가치를 스스로 판단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괴테의 말이라면 자신의 감동은 ‘지적인 체험’이 되지만, 잡화점 주인의 낙서라면 ‘싸구려 감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도이치가 필사적으로 찾아 헤맨 것은 문장의 출처가 아니라, 그 문장에 감동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도이치의 추적 과정을 통해 ‘원본(Original)’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웃는다. 설령 그 문장의 기원이 되는 괴테의 편지가 존재한다 한들, 그것은 독일어에서 다른 언어로, 다시 번역과 의역을 거쳐, 티백이라는 좁은 공간에 맞게 축약되고 편집된 결과물이다. 성경이 수천 년간 필사되고 번역되며 수많은 이본(異本)을 낳았듯,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고전은 이미 누군가의 해석이 개입된 ‘편집된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그리고 대중은 ‘괴테’라는 이름표에 집착한다. 마치 그 이름표가 붙는 순간, 모든 논리적 결함과 맥락의 오류가 면죄부를 얻는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세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인물이 바로 도이치의 친구이자,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을 온몸으로 대변하는 ‘시카리’다. 그는 학계가 신봉하는 ‘인용의 권위’를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학술적 생명을 건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다. 그는 서로 다른 가명으로 논문을 발표해 찬사를 받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실명으로 과거의 글을 ‘무단 인용’함으로써 스스로를 표절 작가로 낙인찍는다. 시카리의 기행은 “메신저를 죽이고 메시지만 남기라”는 과격한 선언과도 같다. 그는 명언이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한다.


즉 명언은 분명 유명한 위인의 유명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익명성과 무개성이 조건이 되는 셈이야. 혹은 맥락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온갖 맥락에 적용할 수 있는 활용도 만점의 말이거나. 근데 난 그래도 된다고 봐. 착각이야말로 평범한 말을 명언으로 만들어 준다고나 할까.


시카리의 말처럼, 명언의 생명력은 역설적으로 ‘맥락의 소거’에서 온다. 괴테가 특정 상황에서 한 말은 맥락이 제거됨으로써, 연애 편지에도, 자기계발서에도, 기업의 신년사에도 갖다 붙일 수 있는 ‘만능키’가 된다. 시카리는 학자들이 죽은 거인들의 입을 빌려 복화술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없을 때마다 “괴테 가라사대”를 외치며 권위 뒤에 숨는다. 시카리의 자폭은 이러한 지적 사대주의와 기만적인 권위 의존 시스템을 향한 테러였다. 비록 그는 학계에서 추방당하고 끝내 복직하지 못하지만, 그의 파멸은 실패가 아니라 그가 던진 질문의 무게를 증명하는 훈장이 된다. 권위주의라는 성벽은 진실 앞에서도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도이치의 딸 노리카는 시카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명언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시카리가 명언의 ‘활용 가능성’에 주목했다면, 노리카는 매스 미디어 시대에 명언이 어떻게 ‘진실을 조작하는 도구’로 변질되는지를 꿰뚫어 본다.


(이전에는) 교양 있는 개인이 고대부터 존재했던 말들을 명언집으로 모아서 소개하는 계몽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풍겼어. 이윽고 매스 미디어의 시대가 오자 정치가, 운동선수, 종교 지도자, 팝 가수가 명언을 인용하기 시작해. 그들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명언을 사용했어. 그게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 '거짓말도 자주 하면 진실이 된다'라고 레닌이 절묘하게 표현했듯이 인용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말은 진실이 돼.


노리카의 지적은 2025년의 현실과 소름 끼치도록 맞닿아 있다. 오늘날 진실의 척도는 ‘내용의 타당성’이 아니라 ‘조회수’와 ‘좋아요’의 숫자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유명인의 발언은 팩트 체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대중은 그것을 의심 없이 수용한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제목은, 실제로 괴테가 모든 지혜를 설파했다는 뜻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괴테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는 현상적 진실을 가리킨다. 괴테는 이제 한 명의 자연인이 아니라, 인류가 지혜라고 믿고 싶어 하는 모든 텍스트를 담아두는 거대한 플랫폼이자 브랜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작가 스즈키 유이가 도이치의 혼란과 시카리의 저항, 노리카의 냉소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명언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내용인가, 아니면 권위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소설의 결말부, 도이치가 도달한 깨달음은 허무하면서도 동시에 해방적이다. 그 문장이 괴테의 것이든 아니든, 그것이 내 마음을 울렸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 이는 텍스트를 감싸고 있던 ‘괴테’라는 포장지를 뜯어내고, 알맹이 그 자체와 대면하는 순간이다. ‘누가 말했는가’에 휘둘리는 것은 노예의 독서이고, ‘무엇을 말했는가’를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주인의 독서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권위에 기생하여 사유를 멈춘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다. AI와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정보에 길들여진 우리는, 어쩌면 시카리가 경멸했던 ‘권위의 복화술사’들에게 놀아나는 인형에 불과할지 모른다. 말을 하는 사람의 권위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단단한 주관이다. 수많은 ‘괴테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권위라는 지팡이를 버리고 자신의 두 다리로 서서 사유할 수 있는가. 이 20대의 젊은 작가는 노련한 거장의 솜씨로, 권위의 그늘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의 언어’를 찾으라고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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