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예능 귀합니다, <My Name Is 가브리엘>

슴슴한 힐링 예능에 철학을 담다

by 천은채

숏폼이 대세인 시대. 트렌드에 발맞춰 쉽게 소비되고 빠르게 양산되는 콘텐츠들이 화제를 모으는 동안, 72시간이라는 시간을 앞세워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내는 예능이 있다. <무한도전>으로 익숙한, 예능계 연출의 최고봉(방금 지어낸 수식어지만 다들 동의하지 않는가?) 김태호 PD의 신작, <My Name Is 가브리엘>에 대한 이야기다.


<My Name Is 가브리엘>은 출연진들이 72시간 동안 다른 나라에 거주 중인 낯선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프로그램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프로그램 소개란에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더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면?'

세계 80억 인구 중 한 명의 이름으로
갑작스럽게 살아가게 될
황당하고도 특별한 72시간이 시작된다.

실존하는 타인의 인생으로 겁 없이 뛰어든
스타들의 생생한 72시간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타인의 삶을 산다라… 컨셉이 독특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박보검/루리 편의 엔딩을 통해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가 단순히 타인의 삶을 대신 사는 재미를 선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더블린에 거주 중인 ‘루리’의 삶을 대신 산 72시간이 끝나고, 한국의 스튜디오로 돌아온 박보검은 이런 소감을 전한다. 자신이 루리의 삶을 대신 살며 그의 친구와 가족에게 루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삶을 살아왔을지가 그려졌다며, 누군가가 ‘박보검의 삶’을 대신 산다면 자신의 주변인들은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가 궁금하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자신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면서.


염혜란/치엔윈 편에서는 또 이런 소감도 등장한다. 염혜란 배우는 중국 충칭의 훠궈 식당 지배인 ‘치엔윈’으로서 사는 동안 그녀의 삶이 특별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고 별 볼 일 없게 느껴지더라도, 그 삶을 대신 사는 누군가에게는 더 없이 특별하고 새로운 일상이지 않겠냐고. 따라서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 또한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하더라. 그런 의미에서 이 프로그램은 여느 예능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것이 김태호 PD만의 연출이 갖는 힘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My Name Is 가브리엘>이 교훈만 주는 지루하고 고지식한 프로그램인 건 물론 아니다. 촬영지가 해외인 만큼, 낯선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브리엘들의 삶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물론이요, 각 출연진이 만들어내는 현지인들과의 케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가브리엘로 파견되는 인물에 따라 에피소드의 톤이 각기 다른데, 출연자에 따라 하나의 예능이 영화로 보이기도, 시트콤으로 보이기도, 잘 짜여진 드라마 같기도 하다. 또한 한 회차에 두 출연자의 에피소드를 나란히 배치해 지루함을 덜었다. 예능 한 회차를 마치 짧은 두 개의 회차처럼 느끼게끔 편성한 것이다.


박보검 편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풍겨 첫 에피소드로 제격이었다, 투박한 듯 다정한 매력이 있는 더블린의 정갈함을 배경으로, 합창단의 단장의 삶을 부여받은 박보검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누구의 삶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야 할지 몰라 헤매던 초반과 달리, 특유의 진정성으로 합창단원들과 교감하며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그의 모습에 내내 뭉클함을 느꼈다. 여럿이서 하나의 곡을 완성해 나가는 ‘합창’이라는 소재를 이토록 잘 그려낸 예능이라니. 세 편의 에피소드는 공연을 준비하는 단원들의 팀워크를 감동적으로 그려냄과 동시에, 그들에게 단장 ‘루리’가 가진 의미, 예컨대 음악을 시작하게 하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간접적으로 실감하게 했다. 에피소드 말미에 박보검이 직접 언급한 소감처럼, 화면 너머로 그의 여정을 함께한 시청자에게도 그들의 열정과 진정성이 와닿은 것이다.


한편 박명수 편은 코믹하고 유쾌한 시트콤 같은 느낌을 준다. 잔잔한 박보검 편과 함께 방영되어 유쾌한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풍겼던 박명수 편은, 치앙마이에서 쏨땀 장사를 하는 우티의 삶을 대신 사는 구조로 전개된다. 함께 일하는 직원 및 가족과 티격태격하며 웃음을 주던 그도, 72시간이 지난 뒤 이별을 맞이하는 순간만큼은 아쉬움의 눈물을 훔친다. 어린 딸에게 필요한 물품을 선물하는 그에게 ‘나중에 한국에 가서 함께 눈을 맞자’라고 말해주던 우티 아내의 작별인사가 잊히지 않는다. ‘고작 3일 동안 정이 들면 얼마나 들겠어?’ 하고 생각한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기네스북에도 오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훠궈 식당의 지배인으로 분했던 배우 염혜란의 에피소드에서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다. 정이 넘치는 휴먼 드라마 같던 식당 동료들과의 우정 및 살가운 가족과의 케미는 물론이요, 엄혜란 편에서만 볼 수 있었던 솔직함 가득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My Name Is 가브리엘>을 시청하는 내내 ‘타인의 삶을 대신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에 대한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혼란과 더불어, 주어진 상황에 몰입해가는 과정까지도 가장 선명히 보여준 것이 바로 염혜란/치엔윈 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염혜란 에피소드 중에는 식당의 점심시간을 틈타 댄스 수업을 받으러 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염혜란 배우는 댄스복으로 갈아입은 후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데, 곧이어 ‘주어진 도구를 활용해 좀 더 적극적으로 치엔윈의 삶을 살아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며 매사에 열정적인 치엔윈에게 완벽히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을 보며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 상황에서 느낄 해방감에 대한 상상을 해 보았다.


영어로 소통하던 박보검 편에서도 그랬지만, 염혜란 편의 해당 에피소드를 시청하며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랐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하루아침에 영국의 대학생이 되어 일상을 멀쩡히 살아내야 했던 교환학생 시절이 내 인생에서는 가장 ‘가브리엘’스러웠던 순간이었기 때문에. 타인의 삶을 산다는 설정에 전혀 이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의 경험과 맞닿아 있는 장면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 프로그램이 정말이지 대체 불가한 예능임을 실감하곤 했다.


파리 올림픽 기간 동안 휴식기를 가진 <My Name Is 가브리엘>은 지난 8월 16일 홍진경, 지창욱 편으로 돌아왔다. 르완다에서 스무 살 모델 지망생의 삶을 살게 된 홍진경은 실제로 모델을 꿈꾸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며 그때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였다. 모델 일의 전망이 어떻냐고 묻는 어머니의 질문에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해보고 싶은 만큼 도전해보고 싶다’라며 미련을 남기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부분은 현재 취준생 신분인 내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언젠가 그만둘 수도 있지만, 해 보고 별로임을 깨닫는 것과 하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같은 이유로 하고 싶은 일에 일단 도전해 보기로 한 나의 선택에 예능 프로그램이 힘을 실어준 것이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방영분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에피소드들도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My Name Is 가브리엘>은 보완해야 할 점들도 분명 가지고 있다. 누가 출연하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색이 달라진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뜻이고, 주어진 상황에 완벽히 몰입하지 못하는 출연진을 볼 때면 시청자도 함께 혼란을 겪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가지고 삶을 돌아보기 힘든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러한 예능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한번 보고 잊힐 프로그램보다는, 저마다의 인생을 특별하게 그리며 진정성 있는 울림을 주는 예능이 더 잘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런 예능인 <My Name Is 가브리엘>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선한 프로그램들이 자극적인 콘텐츠에 밀려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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