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애틋한 사회고발, <소년시절의 너>

완벽한 타이밍에 돌아온 재개봉작의 품격

by 천은채

언젠가 ‘영화는 일종의 트라우마적 체험’이라는 출처 불명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스크린을 통해 이루어진 간접 경험의 강도가 셀수록 해당 경험은 더 짙은 상처를 남기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영화의 인상을 결정짓는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강렬한 신들로 이루어진 영화보다는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그러나 좋은 대사와 장면을 곱씹는 것만으로 충분한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기 때문에 그 글에 선뜻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제,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그’ 경험을 했다. 한 편의 영화로부터 상처를 입는 경험. 그리하여 그 영화의 강렬했던 인상을 잊지 못하게 될 경험 말이다.


8월 28일 재개봉한 영화 <소년시절의 너>는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다. 주인공 첸니엔은 공부로는 전교권에 드는 모범생이지만,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엄마와 함께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첸니엔에게 이들의 불행을 끝낼 유일한 수단은 명문대 진학뿐. 그러던 중 첸니엔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나날이 괴롭힘의 수위가 높아지자 길 위의 소년 샤오베이에게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부탁한다. 첸니엔에게 샤오베이의 존재는 생존을 위한 최후의 방어책이었지만, 두 주인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동질감과 애틋함을 느끼며 동지애를 빙자한 사랑을 키워간다.


첸니엔을 향한 학교폭력이 막 시작되던 영화의 초반부에서, ‘나라면 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상상해봤다. 학창시절의 나는 실제로 선생님께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학생이었으며 실제로 동아리 선배의 폭언이나 또래 사이의 학교폭력을 고발한 적도 있었기에, 무기력한 얼굴을 하고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비행 청소년인 샤오베이에게 의지하는 첸니엔의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극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깨달았다. 지난날의 내가 어른에게 선뜻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시스템의 허점과 사회의 부조리를 일찍 깨달아버린 미성년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매우 한정적임을 말이다.


화면 너머로 부조리한 세상과 참혹한 현실에 맞서기 위해 발버둥 치는 주인공들을 보며, 내 안의 무언가가 요동쳤다. 슬프거나 감동적이라서가 아니라 울화가 치밀어 괴롭던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졌고, 상황이 나빠질 때로 나빠진 주인공들의 처지를 숨죽여 지켜보던 순간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워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사회의 보호를 받아 마땅한 학생들인데도 불구하고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저버린 아이들이 사적 제재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의 배경은 한국이 아닌 중국이고, 주인공의 나이는 대학을 졸업한 나보다 훨씬 어린 10대인데도 이들의 이야기에 이토록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년시절의 너>에서는 학교폭력뿐 아니라 중국 고등학생들의 치열한 입시경쟁 또한 비중 있게 다뤄진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수능을 치른 사람이라면 화면을 뚫고 전해지는 막중한 부담감이 고스란히 와닿았을 것이다. 첸니엔의 말을 빌리자면, 이 학교에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 곳곳에는 성공이나 영광 과 같은 단어를 조합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현수막이 걸려있고, 학생들은 매일같이 그 구호를 외치며 의지를 다진다. 철저히 입시 위주의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학교는 더 이상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또래가 가한 폭력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도 입시에 방해가 된다며 묵인하기 일쑤요,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가 부잣집 우등생으로 밝혀지자 사건을 은폐 및 축소하기에 급급하다. 좋은 대학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사회만큼 위험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대신, 경쟁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기꺼이 짓밟거나 수단화해도 상관없는 기계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한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한 텔레그램 딥페이크 범죄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텔레그램 내에서 벌어진 범죄의 경우 신원 파악이 힘들다’라는 무책임한 발언 아래 피해자들은 직접 텔레그램 방에 접속해 자신의 정보가 도용된 딥페이크 영상물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고, 그렇게 이루어진 사적 수사 및 제보를 통해 수많은 딥페이크 방의 존재와 일부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으로 인해 개인이 처절하게 투쟁했던 사례는 비단 이번 사건만의 일이 아니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잊힘을 강요당한 지난 참사들을 생각해 보라. 공권력이 정작 동원되어야 할 곳에는 정당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기득권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며 끊임없이 분노하고 좌절해야 했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게 되기까지 앞으로 몇 번의 절망을 더 겪어야 할지 몰라 절망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딥페이크 사건이 전국적으로 퍼지는 와중 “전교 상위권을 다투던 학생들의 일탈 행동”, “공부 잘하던 고교생들은 장난으로 만든 합성 사진 때문에 형사처벌 위기에 몰렸다” 등의 문장을 포함한 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해당 뉴스 일부 발췌


피해 학생이 직면한 고통과 상처보다도 가해 학생의 대입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을 강조하며 ‘우등생’들이 ‘일탈’ 때문에 ‘위기에 몰렸다’는 가해자 입장에서의 서술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뿐 아니라 딥페이크 범죄 건으로 수사를 받던 남학생이 출국금지가 해제됨과 동시에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는 뉴스 또한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들의 부모는 대체 누구를 키우고 있는가. 그들에게 자녀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경쟁에서 이기는 일에 매몰되어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기본적인 인격 형성에 소홀한 사회라면, 계속해서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소년 시절의 너>는 부와 명예 등의 세속적인 가치가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더 나아가 인간성을 상실한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두 주인공의 사랑을 밀도 있게 다루고는 있지만, 그 성격이 로맨스라기보다는 사회 고발적이라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사적 제재밖에 없었음을, 그리하여 사건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음을 비판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주인공이 벼랑 끝으로 몰려 의도치 않게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후반부를 보며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 속 이 문장이 떠올랐다.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인이라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다. 따라서 그녀를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첸니엔의 서사를 알고 있는 나, 그리고 정 형사는 그 계단에서의 충동적인 행동을 마냥 비난할 수 없고, 그녀를 명문대에 진학해 가정을 일으키겠다는 야망 때문에 자신의 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끔찍한 범죄자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국에는 그녀가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을 선택을 함으로써 죗값을 치르게 되어 다행이었다. 이미 그녀의 서사에 동요된 나는 그녀가 바라던 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기를 바랐지만, 그런 식의 범죄 미화는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결말이었을 것이므로. 비슷한 맥락에서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학생들에게 별다른 서사가 주어지지 않음에 안도했다. 그리하여 첸니엔이 폭력의 희생자가 된 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며, 학교폭력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끔찍한 범죄라는 메시지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다소 뻔한 소재와 당연한 메시지의 영화가 이토록 큰 충격과 여운을 남기는 것은, 단연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정사를 고백하는 샤오베이 옆에서 첸니엔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장면에서는 너무나 위험해 보였던 둘의 연대가 그 어떤 관계보다 안전하고 따뜻한 울타리처럼 느껴졌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퉁퉁 부은 얼굴로 애써 거짓말을 하던 장면에서는 함께 마음을 졸이며 심문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으며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면회 장면에서는 꾹 참아온 눈물을 속절없이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장항준 감독의 유튜브 채널에 게스트로 출연했던 이옥섭 감독은 ‘결핍과 결핍이 만나면 떨어질 일이 없다. 그렇게 얽힌 관계는 더럽고 징그럽지만, 그게 결국 사랑인 것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첸니엔과 샤오베이의 관계만큼 이 말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랑이 또 있을까. 어둡고 모진 결핍의 세상 속 피어난 끔찍하리만큼 아름다운 사랑을 완벽하게 연기한 두 배우, 주동우와 이양천새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동진 평론가는 <소년시절의 너>가 그렇게 만듦새가 훌륭한 영화는 아니라고 평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관람객인 내게 이 영화는 꽤나 의미 있는 좋은 영화였다. 스토리나 메시지는 물론, 연출적인 측면과 연기적인 측면 모두에서 일관된 흐름과 임팩트 있는 전개를 해나간, 기승전결이 분명한 영화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추천하느냐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 답하긴 어려울 것 같다. 글의 시작에 언급했듯, 이 영화는 분명 우리의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길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희미할지라도 분명한 희망을 얻어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망설임 없이 추천하고 싶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전, 온통 검은 화면에 하얀 자막으로 된 짧은 몇 마디 문구가 뜬다. 나는 그게 이 영화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 시작을 떠올리면, <소년시절의 너>는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하는 동시에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다정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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