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저자 김기현)를 읽고
10월 마지막 주에 들어서며 마태복음으로 아침을 시작하자 결심했다. 여러 번 읽었지만 어떤 음성을 들려주실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으로 읽던 곳에 마음이 가는 장면이 생겼다. 사랑하는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 요셉, 자신과 정혼을 약속했지만 아직 동거 전인데 임신이라니. 만약 이 장면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최소 막장 드라마. 요셉은 ‘이 일을 생각(마 1:20)’ 한다. 나는 이 구절을 한참 곱씹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록 성경에는 요셉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표현되지 않지만 19절 말씀에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결심’하는 것으로 요셉의 생각은 정리된다.
나는 왜 이 구절에서 계속 머물렀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는 달콤한 미래,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라 예상했던 행복한 소망 앞에 이 무슨 날벼락인가. 대단히 큰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닌 우리에게 이런 고난은 너무 가혹하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의 내용만 다를 뿐 오늘 쩔쩔매는 나와 요셉은 처지가 닮았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1장 ‘생각한다는 것’에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소개한다. 1장부터 소름이 끼쳤다. 바로 나를 머물게 한 요셉이 등장한다. 한나 아렌트는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간 아이히만의 잘못은 생각의 무능력이라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면, 더 나아가 남의 처지를 고려하는 진정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평범한 우리 역시 악인이 될 수 있다고 꼬집는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저자는 요셉을 대비시킨다. 당시 문화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마리아를 고발하여 돌에 쳐 죽임 당하게 할 수 있으나 요셉은 ‘생각’한다. 사랑하는 마리아를 믿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끊고자 한다. 생각과 결심의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지는 짐작도 못한다.
오늘날 요셉의 상황은 언제든 우리에게 다른 모습으로 펼쳐질 수 있다. 사랑, 사업, 가족, 친구, 꿈, 진로 등 나의 계획에 순풍이 불기보다 예상치 못한 역풍이 부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순간에는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는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를 상기하자.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조건 반사가 아닌 조건반응을 할 수 있기 때문(57p)이라는 저자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나의 순류를 유지하기 위해 요셉처럼, 저자처럼 생각하자. 매일 이어지는 곤고한 시간을 잘 견뎌가자.
저자는 한나 아렌트 외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얼 쇼리스, 플라톤, 칼 마르크스, 공자, 데카르트 등 총 15권의 고전 문학작품을 읽고, 생각하고 이를 성경과 자신의 논리로 정리한다. 아무리 고전이라도 그대로 빨아들이는 건 맛있는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과 같다. 다행히 우리는 저자의 친절하고도 예리한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고전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는지 발견할 수 있다. 생각하는 힘을 꾸준히 확장시킬 수 있다.
저자와 마지막 장까지 함께하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 부끄럽게도 소개한 책들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어디 가서 아는 척할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라는 얄팍한 지적 만족감.
둘째, 소개한 책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나의 삶에 나만의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지적 호기심.
책 제목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에는 생략된 말이 있다. 바로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고 ‘결심’하고 ‘실천’하라. 나는 저자가 소개한 고전들을 하나씩 맛보리라 결심했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나의 곤고한 날, 역류에 순류로 반응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