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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Oct 05. 2021

그리움은(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붙들고 싶은) 동무이다

림태주 작가의 '그리움의 문장들'과 밤송이 할머니

여보세요를 몇 번 해도 상대방이 침묵이길래 잘못 걸려왔나 싶어 끊을 무렵 낮고 떨리는 음성이 천천히 들려온다. “여.보.세.요,  원.장.님. 맞.아.요?” 누군지 알 것 같다. 심장이 요동친다. 우리 센터를 이용하시다 몇 달 전 요양원에 입소하신 할머니. 꼬장꼬장한 성격에 남들과 친해지기 쉽지 않은 분, 지극정성으로 차려준 딸의 밥상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 한술 입에 대지 않는 분, 그러나 늘 주머니에 박하사탕 가득 가져와 내 손에 쥐어주고 내가 입에 넣을 때까지 지켜보시던 밤송이 같은 매력의 할머니다.


“네 맞아요. 원장이에요”

귀가 어두운 할머니, 잘 들리지 않지만 원장이라는 확신이 드셨는지 폭풍 같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잘.지.내.지.요? 나.는. 잘. 있.어.요. 보.고. 싶.어.요. 코.로.나. 때.문.에. 못. 보.니. 속.상.해.요”

“저도 보고 싶어요. 건강히 잘 지내셔야 해요. 밥도 잘 드시고”


우.리.동.무.들.도. 잘. 있.지.요?

다시 심장이 아려온다. 밤 가시처럼 삐죽삐죽한 말투 때문인지 친한 어르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동무들이 절절하게 보고 싶은 것이다. 목소리에 촉촉이 물이 배어 있다.


요양원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리움을 숨겨야 한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동무에 대한 그리움도. 그래야 가족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녀가 혹시나 가졌던 죄책감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그리움에 데이면 약이 없다. 심장까지 할퀴면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그리운 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마 할머니는 여러 번 고심 끝에 나에게 전화를 하셨으리라. 담담한 듯 우리 동무 잘 있느냐는 말에 나는 그만 수개월간 응축된 할머니의 그리움을 알아채 버렸다.


동무라는 말이 내내 마음을 흩트려 놓는다. 이렇게 정겹고 울컥하는 단어인데 우리가 잘 쓰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아픈 역사 속에서 사상을 의심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은 말이다. 길동무, 어깨동무, 말동무. 혼자서는 잘 쓰이지 않지만 다른 단어에 기대어 그 다정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길, 어깨, 말 뒤에 비슷한 뜻을 가진 친구라는 단어를 붙여보면 말은 되지만 어색하다. 고유의 다정함과 울컥함이 사라진다.


그리움과 동무는 닮았다. 할머니가 그리움을 숨겨야 했던 것처럼 동무라는 말도 그러했다. 사무치게 그리울 땐 동무가 다른 말에 기대듯 그리움을 슬며시 흘려도 된다. 할머니 옆에 그리움을 기대어 줄 그 누구라도, 그 무언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씩 사그라드는 기억 속에 ‘내 동무’ 만큼은 꿋꿋하게 버텨주면 좋겠다.



림태주 작가님의 '그리움의 문장들' 

할머니와 헤어지고 나서 림태주 작가의 책 ‘그리움의 문장들’을 만났다. 작가는 글자 하나하나에 그리움을 새겼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아득했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때의 마음이 기억난다. 아리고 따뜻하고 몽글몽글하다. 누군가 절절히 그립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 책에 기대면 된다. ‘나는 그리워했으므로 그 겨울에 살아남았다’(35쪽). 밑줄을 그었다. 그립다고, 보고 싶다고 내 동무의 안녕이 궁금할 때 할머니는 살아있다. 계속 그렇게 동무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이제 나는 그리움이 무엇이냐 물으면 동무라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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