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앞두고

by dwpark

회사에서 퇴직 준비 프로그램 안내 메일이 왔다. "정년 5년 이내 직원 대상" 나도 해당된다. 정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입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정년이라니. 하지만 현실이다. 나이는 속이지 않는다. 거울을 볼 때마다 늘어가는 흰머리가, 깊어지는 주름이 그걸 증명한다.


퇴직 준비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강사가 나왔다. 정년퇴직 후 재취업, 창업, 자산관리, 건강관리 등에 대한 강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부장, 차장들이었다.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를 하고 있었다.


"여러분, 정년퇴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강사가 말했다. 새로운 시작이라. 들리기는 좋은데, 솔직히 두렵다. 30년을 회사 중심으로 살았는데, 회사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강의 후 옆자리에 앉았던 차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형님, 퇴직 후 계획 있으세요?" "아직 잘 모르겠어. 너는?" "저도요. 막막해요."


우리는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솔직히 무서워요. 30년을 회사만 다녔는데, 내가 회사 밖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 차장의 말에 공감했다.


"나도 그래. 명함 없는 인간이 되는 거잖아. 누가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러게요. 예전엔 명함 하나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회사 다녔던 사람'이 되는 거죠."


집에 와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여보, 이제 정년까지 몇 년 안 남았어." 아내는 놀라지 않았다. "알아요. 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글쎄요. 같이 생각해 봐요."


그날 밤 잠이 안 왔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정년 후의 내 모습이.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이 없는 나. 출근할 곳이 없는 나. 만날 동료가 없는 나. 상상이 안 됐다.


다음 날 선배에게 전화했다. 3년 전에 정년퇴직한 선배다. "선배님, 저 영호예요. 퇴직 후 어떻게 지내세요?" "어떻게 지내긴, 그냥 지내지. 왜?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는 거야?"


선배와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6개월은 정말 힘들더라. 매일 뭐 하고 지내야 할지 몰라서.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갈 곳이 없더라고."


"그 뒤엔요?" "적응했지. 일주일에 두세 번 등산 가고, 헬스장 다니고, 책 읽고.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더라. 생각보다 바빠. 시간이 빨리 가."


"외롭지는 않으세요?" "가끔 외로워. 특히 평일 낮에. 사람들은 다 일하러 가고, 나만 집에 있으면. 하지만 익숙해지더라. 지금은 오히려 이게 편해."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됐다. 적응하면 괜찮아질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나는 선배만큼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며칠 후 회사 동기들과 저녁을 먹었다.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야, 우리 퇴직하면 뭐 하고 살지?" "모르겠어.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아내한테 쫓겨나는 거 아냐?"


"나는 카페나 하나 차릴까 봐." "야, 카페가 쉬울 것 같아? 장사가 제일 힘들어." "그럼 뭐 해? 재취업? 50 넘어서 누가 뽑아줘?" "그러게..."


답이 없었다. 30년을 회사만 다녔는데, 회사 밖 세상은 너무 낯설었다. 우리는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재정 상황을 점검했다. 퇴직금, 연금, 저축, 계산해 보니 검소하게 살면 먹고는 살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취미도 만들기 시작했다. 등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몇 번 다니니 재미있었다. 산에 가면 머리가 맑아지고, 스트레스가 풀렸다. 무엇보다 같은 또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도 배우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하나 사서 주말마다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리기도 하고, 동호회에도 가입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글쓰기도 시작했다. 브런치에 내 경험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점 재미가 붙었다. 댓글이 달리면 뿌듯했고, 공감한다는 반응이 오면 힘이 났다.


아내와 여행 계획도 세웠다. "퇴직하면 유럽 한번 가볼까?" "좋아요. 한 달 정도?" "응,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막연했던 퇴직 후 계획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자원봉사도 알아봤다. 평생 받기만 했으니, 이제는 좀 돌려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 아동 센터에서 멘토링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책 읽어주는 봉사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요즘은 퇴직이 조금 덜 두렵다. 물론 여전히 불안하지만, 준비를 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다. 정년은 끝이 아니라 정말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일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승진, 실적에 집착했는데, 요즘은 좀 여유가 생겼다. 어차피 몇 년 안 남았는데, 뭐 그리 목숨 걸 일이 있나 싶다.


후배들에게도 더 너그러워졌다. "실수해도 괜찮아. 다시 하면 돼." 예전에는 했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며칠 전 신입사원이 물었다. "부장님, 퇴직하시면 뭐 하실 거예요?" "음... 등산도 하고,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여행도 가고. 하고 싶은 게 많아."


"부럽네요. 저는 퇴직이 무서워요." "나도 그랬어. 하지만 준비하면 괜찮을 것 같아. 오히려 기대되기도 하고." 진심이었다. 요즘은 정말 퇴직 후가 기대된다.


30년 회사 생활. 긴 시간이었다. 힘들기도 했고, 즐겁기도 했고, 후회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이제 남은 몇 년은 더 열심히 하고,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좋은 선배로 기억되고 싶고, 후회 없이 떠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


정년은 끝이 아니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30년 회사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볼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는 삶. 회사가 아니어도 그런 삶을 만들 수 있다는 믿는다. 아니, 만들어야 한다.


퇴직 준비는 이제 시작이다. 남은 몇 년을 열심히 준비해서, 자신 있게 "잘 있어, 회사야.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명함을 만들 것이다. 회사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김영호, 여행가, 사진작가, 작가, 그리고 인생을 즐기는 사람" 그런 명함을 만들어서 자랑스럽게 내밀고 싶다.


정년 후의 삶이 기다려진다. 아직 늦지 않았다. 50대 후반, 60대, 70대. 앞으로 20-30년은 더 살 수 있다. 그 시간을 의미 있게,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


회사 생활도 중요했지만, 이제 내 인생이 더 중요하다. 정년은 은퇴가 아니라 졸업이다.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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