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 속 사진

by dwpark

회사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입사 첫날 찍은 사진이었다. 26살, 정장을 처음 입어봐서 어색해하던 그 청년이 나였다.


30년 전 사진이다. 사진 속 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빛이 살아있고, 자세가 꼿꼿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구나" 싶어 씁쓸하게 웃었다.


서랍을 더 뒤지니 다른 것들도 나왔다. 명함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내 직급이 변할 때마다 새로 만들었던 명함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 장 한 장이 내 인생의 한 챕터 같았다.


제일 낡은 명함을 보니 전화번호가 삐삐 번호였다. "김영호 사원, 015-123-****" 그 시절에는 휴대폰이 없었다. 삐삐를 차고 다니며 공중전화를 찾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상장도 몇 장 있었다. "우수사원상", "모범사원상", "근속 10년 상", "근속 20년 상". 받을 때는 뿌듯했는데, 지금 보니 그저 종이 한 장이다. 액자에 넣어두지도 않고 서랍에 처박아뒀다.


동료들과 찍은 단체사진도 있었다. 1998년, 팀워크샵에서 찍은 사진이다. 모두 젊었다. 지금은 절반은 퇴사했고, 일부는 임원이 되었고, 일부는 나처럼 부장으로 남아 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박 대리가 눈에 띄었다. 그는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뇌출혈이었다. 장례식장에 갔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도 언젠가는..." 하는 생각이 처음 든 날이었다.


오래된 수첩도 나왔다. 2005년도 것이다. 펼쳐보니 빽빽하게 일정이 적혀 있었다. 회의, 미팅, 출장, 야근. 여백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이렇게 바쁘게 살았구나.


수첩 뒤편에 메모가 있었다. "아들 축구 경기 - 토요일 2시" 그 밑에 큰 X표가 그어져 있었다. 못 갔다는 뜻이다. 출장 때문에 못 갔던 것 같다. 아들은 아빠가 응원하러 올 거라고 기대했을 텐데.


그 시절에는 일이 우선이었다. 가족보다, 건강보다, 나 자신보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야. 조금만 참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았다. 하지만 그 '조금만'이 10년, 20년이 되었다.


낡은 노트도 하나 있었다. 신입사원 교육 때 받은 것이다. 첫 페이지에 적힌 글이 눈에 띄었다. "목표:10년 안에 부장 되기" 10년 안에는 못 됐다. 15년 걸렸다. 그래도 해냈다.


그런데 부장이 되고 나니 뭐가 달라졌나. 월급이 좀 올랐고, 명함이 바뀌었고, 팀원들이 생겼다. 하지만 행복해졌나? 잘 모르겠다. 오히려 책임감과 스트레스만 늘어난 것 같다.


사진을 한 장 더 발견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회사에 놀러 온 날 찍은 사진이었다. 아들은 유치원생, 딸은 어린이집 다닐 때였다. 지금은 아들이 30대가 되고 결혼을 했고, 딸도 취업을 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는 줄 몰랐다.


그 사진을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주말에도 일하지 말고 놀아줄걸. 운동회에도 가고, 학예회에도 가고, 그냥 집에서 같이 TV나 볼걸.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를.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라고 미루다가 아이들은 다 컸고, 이제는 나를 별로 찾지 않는다.


가장 밑에서 오래된 명함 한 장이 나왔다. 아버지 명함이었다. "김철수 부장" 아버지도 이 회사를 다니셨다. 나보다 훨씬 먼저 이 회사에서 정년퇴직하셨다.


아버지 명함을 내 명함과 나란히 놓아봤다. 같은 회사, 같은 직급. 나는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온 것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이 책상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처럼 후회도 하셨을까. 나처럼 피곤하셨을까. 물어보고 싶지만, 아버지는 1년 전에 돌아가셨다.


서랍 속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며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내 인생이구나. 사진, 명함, 상장, 수첩. 30년의 시간이 이 작은 서랍 안에 들어있다.


퇴직할 때 이 서랍을 비우게 될 것이다. 개인 물품들을 챙겨서 박스에 넣고 집으로 가져갈 것이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후회할까, 뿌듯할까.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30년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것.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것. 후회도 있지만, 배운 것도 많다는 것.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 찍은 사진을 하나 추가했다. 50대 후반의 나. 30년 전 그 청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지만,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


앞으로 몇 년 후, 퇴직할 때 이 사진을 다시 볼 것이다. 그때는 또 어떤 생각을 할까. "수고했어, 영호야"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하자. 후회를 줄이고, 의미를 더하자. 남은 시간 동안 좋은 선배가 되고, 좋은 아빠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자.



서랍을 닫으며 다짐했다. 앞으로의 사진들은 좀 더 행복한 모습으로 채우자. 일만 하는 사진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사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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