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코로나로 한동안 못 만났다가 이제야 모이게 된 것이다.
장소는 학교 근처 식당이었다. 30년 전 우리가 자주 가던 그 골목은 다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이 식당만은 그대로였다. "야, 여기 아직 있네!" 누군가 반가워하며 소리쳤다.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 50대 후반.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배가 나오고,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웃는 모습은 고등학생 때 그대로였다.
"야, 너 완전 아저씨 됐다!" "너는 안 그래? 거울 안 봐?" 서로를 놀리며 웃었다. 나이가 들어도 고등학교 친구들 앞에서는 다시 10대로 돌아간다.
총 15명이 모였다. 한때 50명이 넘는 반이었는데, 연락이 되는 친구가 이 정도였다. "재호는?" "미국 산대. 바빠서 못 온대." "성민이는?" "걔는... 요즘 안 좋대. 사업 실패하고."
다들 한 명씩 근황을 이야기했다. 누구는 회사에서 임원이 되었고, 누구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누구는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달라졌구나.
"야, 영호야. 너 아직도 그 회사 다녀?" 친구 하나가 물었다. "응, 30년째." "대단하다. 한 회사에 30년이나. 나는 세 번 옮겼는데."
"나도 한 번은 이직 생각했었어. 40대 초반에. 그런데 결국 안 했지. 용기가 없어서."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게 용기야. 버티는 것도 용기거든."
술이 한잔 두 잔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깊어졌다. "야, 솔직히 말해봐. 우리 인생 잘 산 거 맞아?" 누군가 진지하게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들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뭐가 잘 사는 건데?" 누군가 반문했다. "그러게. 돈 많이 버는 게 잘 사는 건가, 행복한 게 잘 사는 건가."
"나는 후회돼." 한 친구가 말했다. "30대에 너무 일만 했어. 애들 크는 거 못 봤어. 지금 애들이랑 별로 안 친해." 공감하는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 났다.
"나도 그래. 돈을 좀 벌었는데, 건강을 잃었어. 요즘 약만 10개 넘게 먹어." "나는 결혼도 실패했어. 이혼하고 혼자 살지 뭐."
무거운 분위기가 됐다. "야, 우리 왜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만 해?" 누군가 분위기를 바꿨다. "좋은 것도 이야기해 보자."
"나는 손주 봤어. 그게 제일 좋더라." 한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손주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어. 애들 키울 때보다 더 좋아."
"나는 요즘 등산 다녀. 그게 진짜 좋더라. 산에 가면 머리가 맑아져." "나는 기타 배우기 시작했어. 고등학교 때 못 배운 거."
다들 자기만의 낙을 찾은 것 같았다. 일에 치이고, 가족에 치이다가, 50이 넘어서야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야, 우리 정년까지 몇 년 남았어?" "나는 5년." "나는 7년." "나는 프리랜서라 정년이 없어. 죽을 때까지 일해야지 뭐."
"정년 후에 뭐 할 거야?" 이 질문에 다들 막막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어. 아직 생각 안 해봤어." "나는 카페 하나 차릴까 봐." "야, 카페가 쉬울 것 같아? 장사가 제일 힘들어."
"솔직히 무서워." 한 친구가 말했다. "평생 회사만 다녔는데, 회사 없으면 뭐 하고 살지. 아침에 일어나서 어디 가지?"
공감했다. 나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30년을 회사 중심으로 살았는데, 회사가 없어지면 나는 누구인가.
"그래도 우리 운이 좋은 거야." 누군가 말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우리 반에서 벌써 3명이 세상 떠났잖아." 맞는 말이었다. 교통사고, 병, 자살. 다양한 이유로 친구들을 잃었다.
"그러게. 건강하게 여기 모인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을 들어 건배했다. "우리 건강, 우리 가족 건강!"
2차는 노래방이었다. 옛날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우리의 청춘이 담긴 노래들. 음정이 틀려도, 박자가 안 맞아도 괜찮았다. 함께 부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야, 너 그때 ○○이 좋아했지?" "시끄러워! 그게 벌써 30년 전이야!" " 30년 전이라니... 진짜 시간 빠르다."
시간이 정말 빨랐다. 얼마 전까지 교복 입고 이 거리를 걸어 다녔는데, 어느새 50대 후반이 되었다. 아들딸 키우고, 부모님 모시고, 손주까지 보는 나이가 되었다.
"야, 우리 다음엔 언제 봐?" "내년에 또 보자. 1년에 한 번은 봐야지." "그래, 건강할 때 자주 보자. 나중엔 못 볼 수도 있잖아."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10대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가족보다, 직장 동료보다 더 편한 사람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50대 후반, 인생의 중간쯤 온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후회도 있고, 앞을 보니 불안도 있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이 있고, 집에 돌아가면 가족이 있고, 내일 또 일어나면 할 일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집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 동창들 만났는데, 다들 나이 들었더라." "당신도 늙었어요."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알아. 나도 50 넘었잖아."
"그래도 당신은 멋있어요. 나이 들어도." 아내의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50 넘어서 멋있다니.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침대에 누워 오늘 만난 친구들을 생각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 누가 더 잘 살았다고 할 수 없다.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이다.
다음 동창회가 벌써 기다려진다. 1년 후, 우리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조금 더 늙었겠지. 하지만 여전히 옛 친구들과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