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건네는 말

by dwpark

요즘 신입사원 한 명이 나를 자주 찾아온다. "부장님, 조언 좀 들을 수 있을까요?" 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업무 관련 질문이었다."이 보고서 어떻게 작성하면 되나요?" "미팅 자료는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나요?" 그런 질문들에는 친절하게 답해줬다. 나도 신입사원 때 그랬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질문이 달라졌다. "부장님, 이 회사에서 계속 다녀야 할까요?" "30년 후의 제 모습이 상상이 안 가요." "승진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적성이 중요한가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럽다.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30년 직장생활의 경험은 있으니,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자네는 왜 이 회사에 입사했나?" 내가 먼저 물었다. "그냥... 대기업이니까요. 안정적이잖아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그랬어. 26살에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안정적이라는 게 제일 중요했지. 부모님도 좋아하셨고." 그 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30년이 지나고 보니, 안정적이라는 게 양날의 검이더라고. 안정적이라는 건 변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거든." 그 후배가 눈을 크게 떴다.


"안정적이라는 건 예측 가능하다는 뜻이야. 5년 후, 10년 후 내 모습이 어느 정도 보이지. 그게 편할 수도 있지만, 답답할 수도 있어. 자네는 어떤 쪽인가?"


후배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아직 입사한 지 1년밖에 안 돼서." "그럼 됐어. 1년 만에 알 필요 없어. 나도 10년은 지나야 알았으니까."


어느 날은 이런 질문을 했다. "부장님은 후회 없으세요? 한 회사만 다니신 거." 그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후회가 없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후회... 있지. 가끔 생각해. 다른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창업을 했다면, 이직을 했다면, 전혀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후배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그 선택이 틀린 건 아니야.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거든. 나는 안정을 택했고, 그 대신 모험을 포기했어.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선택이었어."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후배가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모르겠네. 자네 인생이니까 자네가 정해야지."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20대에는 많이 경험해 봐.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실패도 해보고, 자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찾아봐. 나는 그걸 안 해서 40대에 방황했거든."


그날 이후로 그 후배와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업무 이야기보다는 인생 이야기를. 내가 20대 때 겪었던 실수들, 30대 때의 좌절들, 40대 때의 깨달음들.


"부장님, 승진이 중요한가요?" 어느 날 후배가 물었다. "중요하지. 돈도 더 받고, 권한도 생기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나는 승진하려고 30대를 다 바쳤는데, 막상 과장 달고나니 허무하더라고."


"왜요?" "목표를 이루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목표가 생기더라고. 부장이 되어야 한다, 임원이 되어야 한다. 끝이 없어. 그러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돼."


"중요한 게 뭔데요?" "가족, 건강, 자기 자신. 나는 그걸 다 뒤로 미뤄뒀어. '승진하고 나면', '부장 되고 나면' 하면서. 그런데 막상 부장 되니까 또 '임원 되고 나면'이더라고. 그렇게 미루다 보면 인생이 끝나."


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요즘 그런 생각 들어요. 회사 일만 하다가 인생을 놓칠 것 같아서." "그럼 일찍 깨달은 거야. 나는 50 넘어서 깨달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회사 일도 해야 하고, 인생도 살아야 하고." "균형을 찾아야지. 쉽지 않아. 나도 아직도 찾는 중이야. 하지만 의식하고 노력하는 것과 그냥 흘러가는 것은 달라."


며칠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부장님, 선배들 보면 50 넘으면 다들 힘들어 보여요. 열정도 없고, 그냥 정년만 기다리는 것 같고." 뼈아픈 지적이었다.


"맞아. 나도 그렇게 보일 거야. 솔직히 20대 때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아. 피곤하고, 새로운 걸 배우기 싫고, 그냥 익숙한 것만 하고 싶어."


"그럼 어떻게 해야 그렇게 안 되나요?" "글쎄. 방법이 있을까? 다만, 회사 일 말고 자기만의 것을 가져야 할 것 같아. 취미든, 관심사든, 뭐든. 회사가 인생의 전부가 되면, 정년 후에 공허해질 수밖에 없거든."


"부장님은 뭐 있으세요?" "나"? 요즘 글 쓰기 시작했어. 브런치에. 내 경험을 글로 남기고 싶어서. 젊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서."


후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요? 저도 읽어보고 싶은데요." "나중에 알려줄게. 부끄럽긴 한데."


그날 이후 후배와의 대화가 더 편해졌다. 상사와 부하 관계가 아니라, 인생 선배와 후배 같은 느낌이었다.


어제는 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부장님, 저 이직 생각 중이에요." 놀라지 않았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한 회사에 평생 다니지 않으니까.


"어디로?" "스타트업이요. 월급은 적지만, 배울 게 많을 것 같아서요." "좋은 선택이야. 20대에는 돈보다 경험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부모님이 반대하세요. 대기업 다니는데 왜 나가냐고."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우리 세대는 안정이 최고였으니까. 하지만 자네 세대는 달라. 자네 인생이니까 자네가 결정해."


"부장님은 아쉽지 않으세요? 제가 나가면." "아쉽지. 좋은 후배인데. 하지만 자네 인생이 더 중요하지. 회사는 자네가 없어도 돌아가."


그 말에 후배가 눈시울을 붉혔다. "고맙습니다, 부장님. 부장님 같은 선배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도 고마워. 자네 덕분에 많이 생각하게 됐어. 나도 배웠어."


50이 넘어서 깨달았다. 후배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후배에게서 배우는 것이라는 걸. 그들의 질문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그들의 고민이 내 고민을 정리하게 만든다.


30년 직장생활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이 회사에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다. 돈도, 승진도 아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오늘도 후배가 찾아올 것이다. 또 어떤 질문을 할까. 나는 어떤 답을 해 줄 수 있을까. 정답은 모르지만, 내가 아는 것을 나눠줄 것이다. 그것이 선배의 역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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