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아이스크림

by dwpark

삶의 중턱을 넘어, 이제 또 다른 새로운 길을 앞두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다가 올 시간을 그려보는 이 시점에서, 저는 저의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순간들을 지나칩니다. 그 순간들은 때로는 평범하고, 때로는 찬란하며, 때로는 지나치기 쉬운 조용한 빛으로 존재합니다. 지난 세월, 가족과의 따뜻했던 순간들, 직장에서의 치열한 날들, 그리고 나 자신을 찾아 헤맨 작은 여정들. 이 모든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한 개인의 기록이 아닙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계실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은 진솔한 마음의 이야기입니다. 삶의 결마다 스며든 기억과 감정, 그 속에서 반짝이는 의미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엮어내는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결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놓쳤던 감정, 잊고 있던 다짐, 그리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헤매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희망과 기대로 이 길을 걷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부디 이 글들이 당신의 삶 속에서 작은 위로와 공감, 그리고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주하게 될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당신을 저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평범한 여름날의 기억 속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의 삶에도, 그 결 속에 빛나는 순간들이 숨어 있을 테니까요.




50이 넘은 지금도 가끔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동네 구멍가게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순간, 손바닥 위에 놓인 10원짜리 동전 다섯 개가 내게는 세상 전부였다.


1970년대 후반이었다. 그때 50원은 꽤 큰돈이었다. 아버지 일당이 5000원 정도 되던 시절이니까. 엄마에게 "아이스크림 사 먹어도 돼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봤을 때, "그래, 하나만"이라고 하신 그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 구멍가게는 지금의 편의점 같은 곳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운영하셨는데, 동네아이들에게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과자, 음료수, 아이스크림부터 시작해서 학용품까지 없는 게 없었다. 가게 앞에는 항상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놓여 있었고, 그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들은 우리에게 꿈같은 존재였다.


냉동고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30원짜리 작은 아이스크림과 50원짜리 큰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빨간 딸기맛, 초록 멜론맛, 하얀 바닐라맛, 그리고 노란 바나나맛까지. 각각의 그림을 보면 어떤 맛일까 상상했다. 친구들은 "딸기가 제일 맛있어"라고 했지만, 나는 멜론맛이 궁금했다. 하지만 멜론이 뭔지도 잘 모르는 시절이었다.


뒤에서 기다리는 형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야, 빨리 골라" 하면 재촉했지만, 나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용돈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부모님께 조르기도 미안했다.


가게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면 기다려주셨다. "천천히 골라, 어차피 다 맛있어." 그 말씀에 용기를 얻어 이것저것 만져보며 고민했다. 결국 50원짜리 딸기맛을 골랐다. 빨간색이 예뻐 보였고, 뭔가 달콤할 것 같았다. 그리고 큰 게 더 오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시며 "맛있게 먹어라" 하신 그 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50원을 건네드리고, 아이스크림을 소중히 들고 집으로 뛰어갔다.


포장지를 뜯는 순간의 설렘이란.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딸기 알갱이들이 씹히는 식감까지도 신기했다. 그렇게 천천히, 아껴가며 먹었던 그 아이스크림의 맛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중학생이 되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용돈이라는 것도 생겼고, 아이스크림도 더 비싸고 다양한 것들이 나왔다. 100원, 150원짜리 고급 아이스크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고민했다. 막대 아이스크림을 살지, 컵 아이스크림을 살지. 초콜릿맛을 할지, 바닐라맛을 할지.


80년대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배스킨라빈스 31 아이스크림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충격이란. 한 스쿱에 500원이나 하는 비싼 아이스크림이었지만, 그 맛은 정말 달랐다. 친구들과 돈을 모아서 한 개씩 사 먹으며 "어른이 되면 이런 거 매일 먹을 수 있겠지?" 하고 이야기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로망이 조금 사라졌다. 언제든지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덜 먹게 되었다. 가끔 시험 기간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나 하나씩 사 먹는 정도였다.


첫 직장에 들어가고 받은 첫 월급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억난다. 백화점 지하에 있는 비싸다고 소문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한 개에 2000원이나 하는 프리미엄 아이스크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릴 때 50원짜리 딸기 아이스크림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다시 아이스크림과 가까워졌다. 아이들과 함께 편의점에 가서 이것저것 고르는 모습을 보면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빠, 이거 살까요? 저거 살까요?" 하며 고민하는 모습이 꼭 그 시절의 나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고민 없이 사줬다. "둘 다 사. 맛있게 먹어." 어릴 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 가끔은 "아빠 어릴 때는 아이스크림 하나도 이렇게 고민해서 샀는데" 하며 옛날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40대가 되면서부터는 건강을 생각하게 되었다. 당분이 많다, 인공첨가물이 들어있다 하며 아이스크림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끔 무더운 여름날, 어릴 때 그 구멍가게를 지나 칠 때면 저절로 발길이 멈췄다. 이미 편의점으로 바뀐 지 오래였지만, 그 자리만은 변하지 않았다.


50이 넘어서는 또 달라졌다. 손자가 생기면서 다시 아이스크림과 친해졌다. 손자와 함께 편의점에 가는 것이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할아버지, 이거 뭐예요?" 하며 신기해하는 손자를 보면, 50년 전 내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얼마 전 손자와 함께 편의점에 갔을 때의 일이다. 7살이 된 손자가 냉동고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50년 전의 내 모습과 똑같았다. "할아버지, 이거 살까요, 저거 살까요?" 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네가 먹고 싶은 걸로 골라" 하고 말하며, 마음속으로는 덧붙였다. '뭘 골라도 괜찮아. 그게 바로 너의 첫 번째 선택의 기억이 될 테니까.'


손자는 결국 파란색 포장지의 소다맛을 골랐다. 나와는 다른 선택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아이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신만의 취향으로 선택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다.


집에 와서 손자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50년을 살아보니 알겠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어떤 선택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리지 않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선택하는 순간의 진심과, 그 선택에 책임지고 살아가는 용기라는 것을.


요즘도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 편의점에서 파는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맛은 예전과 조금 다르지만, 포장지를 뜯는 그 순간의 설렘만은 50년 전과 똑같다. 그 순간만큼은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기분이다.


그 여름의 딸기 아이스크림처럼, 지금도 나는 선택한다. 더 이상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순간의 진심을 믿고서. 5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배운, 선택의 진짜 의미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든, 우리는 그 여름의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어린아이와 같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용기 있게 선택하고, 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