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7시 40분, 같은 자리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회사 생활 30년, 이 정류장에서만 벌써 25년째다. 지하철역이 생기기 전부터, 이 동네가 개발되기 전부터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정류장 옆 은행나무가 내 나이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이 정류장에서 처음 버스를 타기 시작했을 때는 그 나무도 지금 보다 훨씬 작았다. 25년을 함께 세월을 보내온 무언의 친구 같다. 봄이면 새싹이 돋고,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이면 노란 잎들이 바닥에 쌓인다.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계절을 견뎌낸다. 나처럼.
1990년대 중반, 처음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26살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들어온 첫 직장이었다. 그때는 1분 1초가 아까웠다. 버스가 조금만 늦어도 발을 동동 구르며 택시를 부를까 말까 고민했다. 신입사원이라 지각이라도 하면 큰일 날 것 같았으니까.
그때는 버스도 지금처럼 정확하지 않았다. 배차 간격도 불규칙했고, 교통 정보 시스템도 없어서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추운 겨울 아침, 코트 깃을 세우고 떨며 기다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버스가 30분씩 늦는 날도 있었고, 그러면 결국 택시를 타야 했다. 그때 택시비가 얼마나 아까웠는지.
30대에는 승진에 목말라 있었다. 동기들과의 경쟁도 치열했고, 살림살이도 빠듯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책임감도 무거워졌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것이 성실함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는 버스 안에서도 쉴 수 없었다. 업무 관련 책을 읽거나 영어 공부를 했다. 토익 준비를 하느라 단어장을 달달 외웠고, 승진 시험을 위해 전공 서적을 읽었다.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당시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기억난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모두들 바빠 보였다. 신문을 읽거나 책을 보거나, 아니면 워크맨으로 영어 테이프를 듣거나. 그 시절의 풍경이다.
40대 초반, 과장이 되고 나서는 또 달랐다. 부하직원들을 관리해야 했고, 윗사람들 눈치도 봐야 했다. 중간관리자의 설움을 톡톡히 맛보던 시절이었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업무를 했다. 메일을 확인하고, 하루 일정을 점검하고, 부하직원들에게 보낼 메시지를 미리 작성해두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 정류장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낡은 버스 정류장이 깔끔한 신형으로 교체되고, 전광판도 설치되어 버스 도착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기다리는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위염이 생겼고,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술자리도 잦았고, 담배도 많이 피웠다. 그때는 몰랐다. 내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50이 넘어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마음이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가만히 서 있기 시작했다.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그저 주변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처음에는 시간 낭비 같았는데, 지금은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매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지팡이를 짚고 나오시는 80대 할아버지. 몇 년 전만 해도 혼자서 씩씩하게 걸어 다니셨는데, 언제부턴가 보호자와 함께 나오신다. 세월의 무게를 실감한다. 나도 저분처럼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오시는 할머니도 있다. 아이가 점점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처음에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다니더니, 이제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걸어간다. 우리 손자도 저렇게 자라고 있지 싶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직장인들의 표정도 재미있다. 20-30대는 모두 바쁘다.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를 듣거나. 나도 그랬으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40대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좀 달라진다. 나처럼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생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는 나이인 것 같다.
몇 년 전부터는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후배도 생겼다. 우리 회사 신입사원인데, 가끔 인사를 나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하며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 그 시절의 패기와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의 말을 건네지만, 속으로는 '너도 언젠가 내 나이가 되면 알게 될 거야' 하고 생각한다.
요즘은 계절의 변화도 더 민감하게 느낀다.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변해가는 모습, 겨울비가 내리는 소리, 봄에 새싹이 돋는 모습. 젊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선명하게 보인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여유가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삶의 마지막을 의식하기 시작해서일 수도 있다.
작년 겨울, 눈이 많이 온 날이 있었다. 서울에 20년 만에 내린 폭설이었다. 버스가 1시간이나 늦었는데, 처음으로 짜증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은 좀 천천히 가도 되겠구나' 하며 여유를 부렸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부장님, 괜찮습니다. 이런 날씨에야 어쩔 수 없죠"라고 말하더라. 나이 들면서 생긴 특권 중 하나다. 젊었을 때는 눈이 와도 지각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마음이 조급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50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단순히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하루를 시작하기 전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라는 것을.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집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 아이들 걱정, 부모님 건강, 노후 준비까지. 버스를 기다리는 그 10여 분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한다. 어느새 기다림이 명상 같은 시간이 되었다.
요즘은 아침마다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 있다. 먼저 어제 하루를 간단히 돌아본다. 잘한 일과 아쉬웠던 일, 기분 좋았던 순간과 스트레스받았던 순간들. 그리고 오늘 하루의 계획을 세운다. 꼭 해야 할 일부터 여유가 되면 하고 싶은 일까지.
가끔은 어릴 때 추억도 떠올린다. 이 정류장에서 처음 버스를 탔던 중학생 시절, 첫 직장에 출근하던 20대 중반의 내 모습까지. 그 모든 시간들이 지나가서 지금의 내가 되었구나 하는 감회가 새롭다.
후배들이 가끔 묻는다. "부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여유로우세요? 저는 매일 아침이 전쟁 같은데." 그럴 때면 대답한다. "나이 먹으면서 배운 거야. 급한다고 해서 모든 게 빨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오히려 마음이 급할수록 실수가 늘어나더라고."
정말 그렇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이 급했다. 빨리 승진하고 싶고, 빨리 성과를 내고 싶고,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50이 넘어서 보니 인생에서 정말 급한 일은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대부분의 일들은 조금 늦어져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이 나에게 와서 "부장님, 어떻게 하면 빨리 성공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30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도 선배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성공이 뭔지부터 생각해 봐. 네가 생각하는 성공이 진짜 네가 원하는 건지 말이야." 그렇게 대답했다. 젊었을 때는 성공의 기준이 단순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다르다.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것,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로 기억되는 것. 그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것들이 진짜 성공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부터는 퇴직 준비도 시작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젊었을 때는 퇴직이라는 게 먼 미래의 일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다. 퇴직 후에는 뭘 하며 살까 하는 고민도 생긴다.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여보, 퇴직하면 뭐 하고 싶어?" "글쎄, 그동안 바빠서 못 했던 것들 해보고 싶어. 독서도 하고, 여행도 가고." 막연한 답이지만, 그런 막연함이 오히려 설레기도 한다.
버스가 늦는 날이면 오히려 반갑다. 조금 더 오랫동안 이 여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으니까. 25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다. 그때는 버스가 1분만 늦어도 조바심이 났는데, 이제는 10분쯤 늦어도 괜찮다.
요즘은 정류장에서 만나는 작은 에피소드들도 즐긴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서 망설이던 대학생에게 우산을 같이 써주겠다고 한 적도 있고, 길을 잃고 헤매던 외국인 관광객에게 영어로 설명해 준 적도 있다. 젊었을 때는 남의 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순간들이 평범한 아침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작은 친절 하나가 하루 종일 기분을 좋게 만들기도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 이런 것인가 싶다.
그렇게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인내를 배웠다. 아니, 정확히는 기다림의 가치를, 느림의 미학을, 여유의 소중함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탄다. 나도 뒤따라 올라타면 생각한다. 오늘도 어떤 작은 기다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 점심을 기다리는 시간,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퇴근을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그 기다림들이 또 어떤 작은 선물을 가져다줄까.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매일 같은 길이지만, 50대의 나는 20-30대의 나와 확실히 다르다. 30년 전 조급하던 그 청년에서 지금의 나까지, 이 모든 변화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 작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았지만, 이 정류장에서의 시간들의 계속될 것이다. 퇴직 후에도 가끔은 이곳을 지나며 추억을 떠올릴 것 같다. 30년 직장생활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이 작은 공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의 시작이다.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