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알기_내가 좋아하는 장소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호수를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곳이 있다. 경기도 하남에 있는 미사리 조정경기장이다. 이 장소는 연애할 때 데이트를 하며 알게 되었다. 화창한 봄날 남자친구와 나들이를 간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 컸다. 이곳은 원래 모래밭으로 둘러싸인 섬이었는데, 그 모래가 물결치는 것같이 아름답다 하여 미사리(渼沙里)라 불렀다고 한다. 1986년 조정경기장이 들어서면서 육지와 연결되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 당시 조정과 카누 경기로 열기가 뜨거웠던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2.2㎞가 넘는 인공호수가 있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인공호수 둘레길을 따라 걸어도 좋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도 좋다. 계절별로 옷을 갈아입는 가로수들은 언제나 새롭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푸르름이 가득하다. 가을이면 은행나무와 단풍이 울긋불긋하고, 분홍빛으로 물든 핑크뮬리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겨울에는 은빛 설경을 볼 수 있어 사계절마다 형형색색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하고 싶은 이들은 모델이 되어 그 마음을 사진에 담는다. 계절별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느낌이 다르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 길을 달리면 빨간머리앤이 벚꽃 길을 지날 때의 느낌도 이랬을까 하며 화사한 마음으로 가득 찬다. 뜨거운 여름 우렁찬 매미의 합창은 응원의 소리 같아 더워도 힘이 난다. 가을날에 붉게 물든 고운 잎새와 푸르른 하늘의 콜라보를 보며 달리면 명화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스산한 겨울에는 얼어붙은 호수같이 마음도 꽁꽁 얼어붙을 것 같다가도 설산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면 후끈함이 밀려와 복잡한 마음을 정화해 준다.
호수 주변에는 잔디공원이 있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거나 공을 주고받으며, 스포츠를 즐기는 가족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은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비행기를 날리거나 비눗방울 놀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다정히 누워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있는 연인들도 종종 보인다. 더운 날에도 쌀쌀한 날에도 꼭 붙어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10여 년 전 동적인 활동을 좋아하는 우리는 자전거를 탔다. 남자친구와 나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2인용 자전거의 페달을 굴렸다. 둘이 힘을 합하니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우리의 미래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가족이 된 우리는 아이와 함께 3인용 자전거를 탔다. 이제는 서로가 있기에 가족의 힘으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헬기 착륙장이 있을 만큼 탁 트이고 넓은 곳이라 연을 날리기에도 좋다. 연을 들고 뛰는 아이들의 종종걸음, 더 높이 띄워 주고 싶은 부모의 총총걸음이 합해져 독수리 연, 가오리연, 방패연들이 두둥실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나도 어렸을 때 한강에서 동생과 방패연을 날려보았다. 서로 얼레를 돌려 보겠다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연은 하늘 높이 박차고 떠올랐다. 어린 시절 생각을 하며, 딸이 선택한 독수리 연을 함께 날려보았다. 연을 날리기 위해 처음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다 서서히 떠오르는 연을 보면 그 높이만큼 입꼬리도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진다. 마치 하늘의 제왕 독수리가 두 날개를 펼치고 푸르른 하늘을 훨훨 나는 듯하다.
조정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조성된 장소일 텐데 실제 경기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관중석과 전광판 옆을 지날 때면 응원의 열기를 상상하곤 한다. 가끔 조정 연습을 하는 선수들이 있을 땐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 본다. 검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근육을 보면 경기력 향상을 위해 그간의 노고가 엿보인다. 구령에 맞춰 힘차게 노를 저으면 배가 앞으로 쓰윽쓰윽 나아간다. ‘보기에는 쉬워 보이는 데 많은 힘이 들겠지? 길쭉하게 폭이 좁은 배가 뒤집히지는 않을까? 나도 한번 타서 노를 저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조정경기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라보지 못한다.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배의 맨 뒤에 앉은 키잡이이다. 팀원은 키잡이의 구령과 박자에 맞춰 노를 힘껏 젓는다. 이때 균등한 힘의 배분과 협동심이 요구된다. 마치 가족들 간에도 소통과 협력이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 가족이 함께 살아가려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선수 개개인의 노력과 열정도 중요하듯이, 가족 구성원도 자신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건강한 가정이 꾸려질 수 있다.
요즘은 청소년이 된 딸이 답답함을 느낄 때 종종 방문한다. 2월의 어느 날 딸과 함께 갔다. 자전거 대여소의 문이 닫혀있었다. 마치 사춘기 아이의 닫힌 방문 같아 마음도 답답해졌다. 딸의 원망 섞인 눈초리가 느껴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호수를 따라 걸었다. 요즘 뭐든 엄마 탓인데 또 하나 추가되나 싶었는데 호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딸의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한참을 걷다 다시 돌아와 보니 다행히 점심시간이었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어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곳이 곧 열린다고 하니, 사춘기 소녀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이곳에 오면 꼭 하는 것이 있다. 호수 전망의 관중석에 앉아 사발면을 먹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난 후 시원한 바람을 쐬며 먹는 라면은 꿀맛이다. 바로 매점 앞이라 준비해가지 않아도 사 먹을 수 있다. 넓은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딸의 마음도 트이나 보다. 귀찮아하는 말투지만 대화가 이어진다. 추운 겨울 자전거를 타며 손과 얼굴이 무척 시렸지만, 집 밖으로 나오니 사춘기 딸과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아 마음이 훈훈해졌다.
어느새 엄마만큼 훌쩍 큰 딸은 1인용 자전거 타기를 원한다. 독립된 자아로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속도에 박차를 가하듯 자전거를 탄다. 이제는 각자의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이곳에서의 옛 추억을 떠올린다. 딸에게 엄마 아빠 연애 시절 추억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그 장소를 함께 공유하니 감회가 새롭다. 딸도 우리 가족이 함께 자전거를 타며 발휘했던 협동심을 잊지 못할 것이다. 먼 훗날 딸도 새로운 가족을 이루어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며 옛 추억을 떠올릴 것을 상상해본다.
이 장소에는 수많은 이들의 추억이 담겨있을 것이다. 연인과 데이트를 한 추억, 가족을 이루어 아이와 함께 온 추억, 또는 새로운 애인과 다시 온 연인의 추억, 가족 중 누군가가 하늘나라로 가서 함께 오지 못한 추억 등 수 많은 추억을 호수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깊은 호수는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의 기억을 간직한 채 머물러 있다. 삼라만상에 뿌려진 수많은 추억을 뒤로한 채 시간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