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마주 보는 봉우리들은 팔음산(771m)이다. 호랑이가 등줄기를 곧추세우고 엎드려 노려보는 듯하지 않나.
설계자에게 이 홀을 어떻게 앉혔느냐고 물으니, 땅을 처음 매입하고 나서 코스 부지 산중을 몇 번이고 발로 헤맸다고 한다. 거듭 딛고 다니다 보니 물길과 코스 길이 그려지더라고.
코스의 ‘샷밸류’니 심미성이니 들먹일 필요 없이, ‘살아 꿈틀대는’ 홀이다. 먼 속리산에서 뻗어 내려와 백화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맥동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백두대간 흐름 전체와 맞서는 기분으로 플레이해 볼만 하다.
설계가의 예민한 감수성은 이 맥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홀을 만들 수 있지 않았겠나. 홀 왼쪽은 가파른 경사의 백화산(933m)이어서 장마철 물의 흐름을 감당하려고 자연 계곡을 그대로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등고선을 따라 홀이 진행하는 가운데, 두 줄기 깊은 골짜기가 홀을 가로지르고 있다. 마침 그 계곡들이 맞은편 산의 기세와 호랑이 줄무늬처럼 어울린다.
처음 문 열었을 때 이 홀 그린사이드에 벙커가 세 개 있었는데 두 개를 메웠다(티샷으로 깊은 골짜기를 넘겨 티샷하고, 또 한 번 더욱 위협적인 계곡을 건너 그린을 노려야 한다. 평범한 골퍼들은 계곡을 넘기기도 어려운데 벙커가 너무 가혹하다는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린도 솥뚜껑 같다.)
생각해 보면 양쪽에 벙커가 하나씩 있는 것은, 이 홀의 범상치 않은 자연 기운에 견주어 평범하지 않았나 싶다. 하나쯤은 더 깊은 할로우로 각인해 놓았다면 맹수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살아나지 않았을까.
- 이런 얘기를 하면 재미로 듣는 골프장 사업자들이, ‘복호伏虎 형국’ 등의 풍수를 들먹이면 귀가 쫑긋해한다 ㅎㅎ-
블루원상주의 홀들은 ‘모두가 시그니처 홀’은 아니더라도 상당수 홀들이 저마다 다른 상상력을 부른다. 흥미로운 홀들과 수려하고 서정적인 홀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이 홀은 오로지 이곳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함께 라운드하며 내 생각을 얘기했을 때,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설계가의 눈에서 푸른 불빛이 일렁였다.
시간이 흐르며, 원래의 설계 의도에서 벗어나, 블루원상주의 홀들이 시나브로 밋밋해지는 느낌이라 아쉽다. 이 홀은 특히 그렇다.
이 홀 그린 뒤의 바위를 코끼리 바위, 사자 바위 이런 식으로 부르던데 ‘족보 없는’ 작명이다.
골프장들 가운데 ‘스토리텔링’이니 하여 억지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곳들을 자주 보는데, ‘없어 보이는’ 짓이기 십상이다. 자연이 부자연스러움을 좋아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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