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기 이를 데 없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갈 무렵 아주 깔끔하게 망하셨다. 안전장치 하나 없는 수직 낙하였다. 동업자들이 한 푼도 손해 보기 싫다며 아버지에게 투자 원금을 토해내라고 하는 사이 아버지는 회사를 살리려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사업 확장이라는 무리수를 두셨다. 그렇다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람이 이렇게 빨리 망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가족을 통해 어린나이에 일찍 깨닫게 되었다.
빨간딱지가 붙고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초중 고등학교 모두 부유하게 보냈던 내가 처음 겪는 배고프고 서러운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20살의 나에게 가장의 책임이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도 ‘사업은 절대 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는 중앙대학교 연극학과였다. 사실 연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연예인이 되려면 연극영화과를 가면 되겠지? 라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시작된 희망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아이돌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했던 부모님은 허락을 하지도, 그 학과를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다녀야하는 연기학원도 보내주시지 않았다. 대신 참 많이도 맞았다. 성적이 떨어졌을 땐 낚싯대로 100대를 맞기도 했고 , 오디션을 보러갔던 날 밤엔 말 그대로 아버지에게 밟혔다. 너무 많이 밟혀서 책상 밑에 숨어들어갔는데도 아버지는 계속 밟으셨다. 후에 아버지는 “그렇게 많이 때리면 니가 포기할거 같더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랬던 내가 재수를 통해 수능시험점수가 대박이 났다. 공부는 딱 한 달 정도 했었다. 아이큐가 142였던 나를 부모님은 가만두지 않았다.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던 형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갈거라 생각하시곤 스파르타 입시학원에 집어넣으셨다. '일단 넣어 놓으면 어떻게든 마음잡고 공부하겠지, 그 이상을 하겠지'라고 생각하셨겠지만 난 통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첫 번째는 부모님이 원하는 평범한 일반대학교의 일반학과는 가고 싶지 않았던 탓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꿈이나 장래희망이 끌리지 않았기에 ) , 두 번째는 밤이면 밤마다 술에 취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던 탓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혼자서는 전혀 찾지 못했기에 문제집의 글자도 , 선생님의 강의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수능을 한 달 남긴 어느 날 어떤 장수생(재수 3~4년차) 형의 “니가 여기 온 목적은 대학 가려고 온 거 아냐?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라는 말에 갑자기 마음이 확 쏠리면서 그때부터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학원에서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었고 스스로 복습을 할 겸, 나에게 무료로 과외를 해 주었다. 오늘은 언어영역, 내일은 수학, 영어는 원래부터 잘했기에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을 친구 한 명씩 돌아가며 과외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당 해 수학능력평가에서는 전국 상위 0.07퍼센트라는 수능 점수를 받게 되었다.
그때가 되자 아버지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셨다. “이렇게 높은 수능점수라면 니가 가고 싶어 했던 과를 갈 수 있지 않느냐.” 라며 연고대를 고민하던 나에게 갑자기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권하셨다. (마치 오랫동안 나를 응원해 줬던 것처럼! 당최 그 논리의 기승전결을 아직도 이해를 할 수 없다. (좋은 아버지지만 서로의 사고방식은 꽤나 다르기에 ) 물론 중앙대학교 연극학과에는 실기시험을 보지 않아도 수능점수로만 들어갈 수 있는 전형이 있었고 그 전형으로 지원을 해 보면 합격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즈음엔 나도 소위 속물이 되어 “연고대 아무과라도 들어가면 먹고는 살겠지. 중앙대졸업생보다는 연고대 졸업생이 낫자나?” 라는 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한데 아버지의 말에 잊고 있던 꿈이 갑자기 생각이 났고 연극의 연자도 모르는 내가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들어가게 되었다. 경쟁률이 100대 1이었는데 수능점수만 믿고 날 넣어주신 것이다. 실기나 면접은 보지도 않고.
말 그대로 어쩌다보니 들어간 대학이었다. 딱히 연극을 열심히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에 연예인같이 생긴 선남선녀들이 모여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겠지. 개중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아이돌이나 배우들이 섞여 있겠지. 그들과 친구하며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그런 드라마같은 즐거운 상상에 젖어 대학을 들어왔다. 정말이다. 난 이렇게 단순하고 허무맹랑하다.
한데 그건 나만 그런듯했다. 대학을 들어와 보니 웬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연극에 미치고 연기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그 친구들은 배움에도 미쳐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연기수업으로 부족해 연기학원을 추가로 다녔다. 모 대학교 선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대학교지만 연기를 배우러 오는 곳이 아냐! 이미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와서 자랑스러운 중앙대학교의 졸업연극작품을 드높히는 곳이라고!!! 그러니까 여기서 기초 연기를 배울 생각이면 자퇴하고 연기학원이나 다녀!!” - 그 선배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 동기들은 재즈댄스를 다니고 발레를 다니고 한국무용을 배우러 다녔다. 당대 대학로에서 잘나간다는 노래 선생님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노래를 배우러 다녔다. 훌륭한 배우가 될 준비를 참으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열정과 지식이 없는건 나 뿐 인듯했다. 대학만 들어가면 알아서 되겠거니 생각했던 내가 ‘아직 정해진 꿈이 없음’으로 인한 ‘배움에의 열정도 없음’의 상태란 것을 느끼고 묘한 소외감을 느꼈던 시절이다.
꿈도 없고 열정도 없는 그럭저럭 쓸려 다니는 한 해를 보냈다. 무대장치의 소품을 만들기도 하고 연극연습실 구석탱이에 앉아 시키는 연출부의 잡일들을 하고 태어나서 처음 무대에서 연기를 해 보기도 했다. 남들은 이미 학원에서 대학내내 배울 연기술들이나 연극에 관한 상식을 다 배우고 왔는데 연기에 대한 개념도 안 서있던 내가 민폐투성이가 된 것은 당연하거니와 심지어 그들과 섞이기도 힘들었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면 (당시 나의 시선으로는) 당대의 중견 요리사들이 모여 만찬회를 준비하려고 하는데 가스레인지를 켜보지도 않은 초짜가 쭈뼛쭈뼛 구석에 서서 남들이 도미찜을 하고 갈비찜을 만들 때 계란후라이하는 법을 어디다 물어보아야 할지 몰라 초조해 하는 모습과 같았다.
웃기지만 그때부터였다. 내 배움의 열정의 시작은 .
'도대체 이런 것들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느냐.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지식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깊길래 같은 나이의 친구를 이토록 자괴감이 들게 만드느냐.'
속에서 활활 불이 타올랐다. 하지만 화가 났다고 한들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 그룹에 끼기 위해, 그 단체에서 인정받기 위해 나도 더 빨리고 배우고 더 많이 알고 더 잘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학원을 다닐 수 없다면 책이라도 사보고 싶고 공연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애저녁에 망해서 집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러니 당시로선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음을 깨닫고 꽤 우울해 했었다. 게다가 학교에서 신입생들을 부려먹는 일은 얼마나 많은지, 뭔놈의 무대작업이 그렇게 많고 뭔 놈의 잡일이 그렇게 많은지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때는 아르바이트라도 했다간 ‘학교 단체 작업에 나오지 않는 놈’ 으로 찍혀 동기들끼리 다 같이 기합 받는 일이 허다했다. 그렇기에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과 연극연습, 무대작업을 마치고나면 밤에는 선배들의 술자리에 불려가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언젠가는 돈을 정말 많이 벌자. 그래서 마음껏 배우자. 그런 다음 절대 무시당하지 말아야지. 나도 남들과 같은 꿈을 꾸고 그들의 레벨에서 말을 섞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고 또 들었다. 동시에 이제부터 내가 뭘 하든 다 배움으로 승화시킬 거야. 학원을 다닐 수 없다면 지금부터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에 의문을 품고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서 분석하고 공부하자. 그러면 일상에서도 배울 점이 분명히 많을 거야. 라고 어떻게든 학원이나 교육기관을 다닐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우울할 수 가 없었다. 매일이 지치고 외롭고 괴롭고 죽고싶기만 했다.
군대를 가기 전 대학선배들과 같이 술자리를 가졌다. 어떤 연극의 뒤풀이였다. 어쩌다보니 당시에 모두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연극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또 한편으로는 Mr.Know-It-All처럼 오만에 동시에 불타 계시는 어떤 대 선배와 술을 마시게 되었다. 연극을 하며 궁금했던 점이나 알고 싶은 점을 물어보려는 찰나 그 선배가 말했다.
“ 나랑 말하고 싶으면 책 1000권 읽고 와.”
와. 멋있었다. 솔직히 그땐 그 말에 좀 충격 받아서 아 이 선배의 지식은 진짜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럼 책 1000권을 읽어야지. 그래서 이 선배 랑도 다시 이야기해야지” 라고 다짐했었다.
그 후 군대를 가기 전까지 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도서관을 가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었다. 또 연극을 많이 볼 수 없다면 영화라도 많이 보자. 라고 생각하고는 여러 가지 영화들의 DVD를 빌려서 하루에 몇 개씩 보았다. 돈이 없으니 유명한 뮤지컬 공연도 못보고, 해외 여행이나 해외연수는 못가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당대의 문화유산들을 보며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며 나만의 지식의 틀을 가지려고 했던 시도였다. 까페에서 서빙을 하고 편의점 야간알바를 하고 노래방에 구토한 손님들의 배설물들을 치우며 어떻게든 꿈을 키웠다.
군대를 간 후 자대를 배치 받았을 때 휴게실에는 상당한 양의 책이 있었다. 휴게실은 매일 새벽 내내 열려있었고 중대장께서는 부대원들이 휴가를 나갔다 올 때 각자 3권씩 새 책을 들고 오라고 지시했었다. 난 돈이 없어서 책을 가져가지 못했지만 ... 나에게 주어진 선물같은 그 책들을 나는 매일 읽었다. 책 읽는 속도는 빠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속독학원에 날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도 난 책을 대각선으로 읽는 , 이른바 속독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기에 학원에서는 나에게 몇번 책읽기를 시켜보시더니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그렇다보니 휴게실 책꽂이에 있던 약 500~600권이상의 책들을 군 생활동안 전부 다 읽었다. 매일 새벽3~4시까지 책을 읽었다. 부대 내에서 미친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소문이 나서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걸 아는 다른 부대원들이 자기만 몰래 읽으려고 했던 해리포터시리즈나 흔하지 않은 유명한 책들을 빌려주기도 했다. 고맙게도. 그렇게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도 읽게 되었다. 휴게실의 책 권수가 많지 않아 내가 원하는 책을 골라서 읽을 수는 없으니 제목이나 내용과 상관없이 마구 읽었다. 당시에 MBC느낌표라던가, 무슨 협회, 무슨 단체 등등에서 선정한 꼭 읽어야 할 책들, 필독도서, 청소년, 청년 권장도서, 들이 많았고 그 모든 책들을 정말 재밌게 읽었다.
군인이 밤늦게 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내 군생활이 조금 특이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군 생활은 조금 특이한 편이었는데 하루의 일과는 부산지방경찰청에서 했고 잠은 영도경찰서 방범순찰대에서 잤다. 영도경찰서에서 자고 일어나서 부산지방경찰청에 출근한 다음 일과를 마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영도경찰서로 돌아와서 잠을 자는 생활이었다. 그렇다보니 영도경찰서의 고참들은 나를 부산지방경찰청소속이라 부르고 따로 터치를 하지 않았다. 드라마 DP에서 질나쁜 고참이 정해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일과를 마치고 영도경찰서로 복귀한 후에는 새벽까지 휴게실에서 책을 읽는 것에 대해 특별히 혼이 난 적은 없다.
부산지방경찰청에서 했던 업무는 공연사회였다. 당시에 포돌이홍보단이라 불리는 공연단이 있었는데 의무경찰이나 전투경찰중 노래나, 춤, 연기를 전공한 대원들을 차출해서 만든 공연단이었다. 난 사회를 맡게 되었고 군생활 내내 500회 이상 여러 장소들을 다니며 공연하게 되었다. 때론 기타를 치기도 했고 때론 만담을 하기도 했고 때론 춤을 추기도 했다.
태어나서 기타를 쳐 본적도 없고 사회를 본 적도 없었다. 웃기지만 책을 통해서 ,티비를 통해서 공부를 했다.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웃기는 포인트를 메모했고 사회에 관련된 책을 읽고 직접 무대에 서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그날 느낀 점들을 메모하고 기록했다. 심지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마술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마술과 관련된 책을 사서 연습하고 , 마술도구를 사러가서는 그 가게 사장님에게 10분동안 배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빈곤하며 민폐 넘치는 죄송스러운 공부방법 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에 “돈이 없으면 뭐든지 어디에서든지, 길가는 개미한테서라도 배워야지. 그래야 내일은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어.” 라고 늘 자기 세뇌를 하였고 그때 가졌던 생각이 지금의 내 배움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다. 물론 뭐든지 공짜로 배우려고 했던 내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부끄럽고 초라하고 민망하다. (몇 번이나 언급할 정도로) 학교에서든 군대에서든 늘 듣던 소리가 “시발색갸 이런건 학원가서 돈 주고 배워. 여기가 학원이야?” 그 말이 참 큰 상처가 되었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무엇이든 배워야 했다. (당신도 나같은 처지였다면 그랬을지 모른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 자대 휴게실에 있던 책을 모두 읽고 , 휴가 나와서도 책을 읽고 (돈이 없으니 할 수 있는게 없어서), 당시 만나던 여자 친구에게 받았던 책 선물도 모조리 읽었다. 얼추 1000권이 금방 채워졌다. 그 후 제대 후 다시 그 선배를 만나서 “선배님. 읽고오라던 1000권 다 읽었습니다. 이제 다시 이야기하시죠.” 라고 이야기를 꺼냈더니
“와 진짜 대단하네. 그냥 한 말이었는데.” 라고 했다. 허무했다.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그쯤에는 책을 읽는 것이 그냥 나에겐 일상이었으니까.
참 있는 집 자식들이 모인 연극학과라는게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그들은 장래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집이 몇 개가 있고 어머니가 어디어디 교수이거나 사업가 집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배우라는 꿈을 품고 있으니 연극을 하고 영화를 하고 탤런트가 되고 기획사를 들어가겠지라는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돈보다는 명예와 친구와 명분이 중요한 아이들 틈에서 난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했다. 나도 뭐라도 진로를 잡고 노력해야 했으나 과가 과인만큼 보통의 회사입사를 준비하는 취준생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을 했고 뭐라도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그때부터는 귀찮을 정도로 학교 교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또 다시 진상 짓을 했다.
그때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신 교수님이 있으니 ‘화술과 연기’ 시간의 우상전교수님과 재료극(material theatre)의 대가 극단 꽃의 대표 이철성 교수님이다. 재료극은 나에게 새로운 창작활동의 틀, 즉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예술작품의 창작법을 참으로 똑똑한 방법으로 (서울대를 나오시고 이스라엘 유학을 하신 교수님의 섬세하고 지적인 방법론으로 ) 자상하고 친절하게 배울 수 있게 해주어 지금의 다양한 창작활동의 밑바탕이 될 수 있었고, 국립극단출신의 우상전교수님의 독설가득한 화술수업은 광고성우로서 내가 있을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화술의 밑바탕을 깔아주었다.
특히 우상전교수님의 화술수업을 듣고 있노라면 내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감히 말이라고 할 수 없는 허접쓰레기 소리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었다. 여기서 또 자존심이 발동해서 어떻게든 이 교수님에게 내가 인정받고야 만다라는 생각이 들어찼다. 교수님의 책을 몇 번이나 읽으며 아침부터 밤이 새도록 화술 연습을 하고 화술 트레이닝을 했다. 실전에서 쓰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독립영화작업에 참여하며 발성스킬을 실험하고 업그레이드 시켰다. 당시에 내가 총 참여했던 독립단편영화들이 추후에 세어보니 약 100편정도 되더라. 실전에서 먹히면 교수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 후 졸업 때까지의 몇 년간을 모조리 화술에만 쏟아 부었고 발성훈련과 독립영화촬영에만 쏟아 부었다.
그 후 어쩌다보니 박카스 광고촬영을 하게 되었고 촬영 후 후시녹음을 하러간 자리에는 당대 최고의 프로덕션 감독님들과 대행사들, 오디오피디와 녹음실실장님들이 모여 있었다. “야 쟤 잘하는데? 연락처 받아놔.” 그때부터 내 광고성우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침 잘됐다. 난 화술에 목숨을 걸었고 노력했더니 갑자기 돈을 벌게 되었다. 다만 모든 직업이 그렇듯이 내 목소리가 대중들에게 또 업계에게 알려지기까지엔 시간이 걸린다.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었지만 돈이 바로바로 지급되는게 아니다보니 밤에는 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또한 아직까지 연기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었고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 또한 자리했기에 여느 배우지망생들과 다르지 않게 낮에는 오디션을 보러 다니거나 극단에서 연극연습을 했었다.
여전히 돈은 부족하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배움에 대한 갈증은 가득하던 찰나에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빡세다던 극단 성북동 비둘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춘향이라는 공연을 하며 태어나서 먹을 욕은 다 먹은 것 같다. 만나본 중 제일 무섭고, 또 제일 매섭고 예민한 연출과 그 아래에서 오래오래 버텨온 대단한 배우들에게 “너 참 연기 더럽게 못한다.”라고 욕을 무지하게 많이 먹었다. 참고로 그곳은 당시 배우들의 무덤이라 불리던 곳이었고 어느 대학 연극영화과, 어느 대학 연기과에서 연기 잘한다고 소문나서 온 애들이 와서는 하루 이틀 연습을 해보다가 “내가 이렇게나 연기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구나,” 라는 말과 함께 연기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저 뭔가 더 높은 수준의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었다. 연출과의 미팅에서 그가 했던 연기와 화술, 신체에 대해 간단한 메커니즘의 설명을 듣자. “여기라면 더 배울 수 있어!” 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잘됐다. 난 돈은 없지만 욕먹을 자신은 있고 어떻게든 내 것으로 소화시킬 자신은 있었다. 난 더 높은 단계의 나로 올라가야 했고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내 인생도 끝이라고 생각했기에 매일매일 연습하다 뛰쳐나가 토할 때까지 신체 트레이닝을 하고 (정말 매일 토했다. ) 작품 연습 땐 세상에 존재하는 쌍욕을 다 먹으면서도 어찌어찌 주인공배역을 맡아 장기공연을 끝냈었다. 참 욕을 많이도 먹었는데 그 연출이 그렇게 강조했던 화술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즉 몸을 써서 하는 발성방법을 공연 중반이 되어서야 터득할 수 있었다. (그때 연출은 포효했다.그거야!!! 그거라고 !!!!!!!!!이 모지리 쌔끼야!!!!) 그 때 또 한 번 내 화술과 발성이 업그레이드되었다. 그 후 여러 공연을 통해 받은 만큼 돌려드리고 나서 다시 오디션을 보고 영화배우를 꿈꾸던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다.
그 즈음에 내가 녹음했던 광고하나가 대박이 났다. 아마도 갤럭시탭 광고의 런칭편이었던 것 같다. 내 발성이 바뀌고 연기의 폭이 넓어져서 저음으로, 자연스럽고 거치친, 상품성이 있는 목소리, 나는 새롭게 떠오르는 '목소리' 상품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이 모든 인생동안 내가 배우고 고민하고 욕먹으면서 깨우쳤던 그 모든 발성기술과 연기스킬들이 본격적으로 시장의 선택을 받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수입이 수직상승했고 어찌어찌 남들이 다 하는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꽤 오랜시간 없었기에 정말이지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돈을 벌어서 제일 먼저 한 게 무엇인지 아는가.
영어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어학연수를 못간게 한스러워서. 그것도 가장 비싸다는 강남의 모 월xxxx 영어학원에 2년을 일시불로 등록한 것이다. 과거에 해외에서 어학연수하고 온 대학교의 모 친구가 외국친구와 영어로 전화통화를 ‘매우 큰소리로.’ ‘나 영어 진짜 잘해.’를 가게 매장 전체의 손님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크고 또 큰 소리로 온 몸으로 뿜어내던 자신감이 부럽고 멋있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멋있어서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외국인과 편하게 즐겁게 대화 하면 더 골져스해보이고 더 파뷸러스해보일 것 같았다. 어쩌면 헐리우드에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가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일이 없을 땐 영어학원에 가서 프리토킹을 하고 기회가 되면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나가고 또 BBB라 불리는 영어통역자원봉사도 시작했다.
국민 영어책인 그래머인유즈(grammer in use) 를 풀고 원어민들이 자주 쓴다는 phrasal verb (구동사) 를 공부하고 배운건 또 통역등에서 써먹고, 미국드라마 영국드라마를 줄창보고, 본 걸 또 보고, 자막 없이도 보고, 영화 대사를 따라해 보고. 그래서 마침내 영어오디션도 보고... , 정말이지 그들의 문화를 알기 위해 외국인 교회도 나갔었다. 언어는 문화를 포함하니까.
그때 나갔던 교회가 하필 흑인들만 나가는 교회라서 약간 진짜 문화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영어는 그 후로도 10년 정도를 더 공부했다. 오픽(OPIC: 외국어말하기듣기 평가) 시험에서 advanced를 받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쯤 그만! ' 이라는 생각으로 멈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돈을 많이 벌지만 술도 마시지 않고 골프를 치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 후로도 나는 그간 살면서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데 많은 돈을 소비했다. 재밌고 특이한 것들도 많이 배웠다. 당시 유튜브에서 봤던 흑인 디제이가 멋있어 보여서 디제잉을 배웠고 , 80.90.00년대 음악의 바이브, 흐름을 배웠다.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며 흥이 나는 이유를 배웠고 어떻게 하면 더 그 바이브를 신나게 만들 수 있을지 배웠다. 실제로 이태원의 모 라운지에서 디제잉도 해 보고 , 장비에 아낌없이 투자하기도 했다. 사실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피아노연습과 같이 꾸준히 오랜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서 반복 연습하는 과정들을 ... 매우 힘들어 하는 성격이므로. 시도만 꾸준히 했고 결국 작곡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일본어도 배웠다. 10년 전 일본으로 광고녹음을 하러 갈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 갔던 일본이 너무 친절했다. 역사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는 차처하고 그들의 일상이, 일개 광고성우에게 오션뷰 5성급호텔 스위트룸을 잡아주는 그들의 배려가 , 아침부터 밤까지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외국인에게 베푸는 친절함이, 일 할 때 그들의 세심함과 깔끔한 일처리가 3일간의 출장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어 난 일본에 매료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도쿄와 삿포로 출신의 선생님들을 만나 일본어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 역시 목표는 단순했다. “일본을 좀 더 제대로 즐기고 싶으니까.”
그 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옷을 잘 입는 방법이 궁금해서 퍼스널 쇼퍼나 스타일리스트에게 직접 돈을 지불해서 멋진 옷을 연출하는 방법들을 배우기도 했고 퍼스널트레이너와 함께 식스팩이 아닌 에잇팩도 만들어보기도 했다. 피티, 요가, 크로스핏, 수영, 테니스 등등을 모두 몇 년이 넘는 시간동안 배워보며 발성과 목소리를 개선할 수 있는 프로그램등에 적용시켜보기도 했다. 심지어 스타일리스트학원에 다녀보기도 했다 , 매 시즌마다 SS, FW를 보며 패션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부하기도 했다. 요리학원을 다녀보기도 했는데 일식 학원을 다녀 스시코스, 숙성회 코스를 밟기도 했다. 스시는 그 후에도 아버지 칠순 때라던가. 친구들과 캠핑을 갔을 때라던가 , 누군가 집에 왔을 때 등등을 통해 연습하고 베풀 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 집엔 칼의 종류가 많다.
물론 광고녹음은 계속해서 하고 있었고 그 무렵에는 맥도날드의 광고성우가 되어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목소리 톤을 유행시키며 광고 녹음을 하고 있었다. 많은 것을 배운만큼 그 지식들은 고스란히 새로운 목소리의 개발과 더 나은 발성으로의 연결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배움과 경험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식지 않았었다. 또한 책을 읽는 습관은 굳게 박혀 있었다. 그땐 내가 직접 원하는 책을 고를 수 있고 마음껏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으니 매일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읽었었다.
난 서점에 가면 항상 두 권의 책을 샀다. 한 권은 인문학이요. 한 권은 소설 ,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일본의 호러나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인문학 서적은 심리학, 역사학, 철학을 거쳐 종교학에 이르렀고 초기불교경전등과 성경, 티베트 사자의 서등을 비롯한 이른바 무엇인가 더욱 진리를 추구하는 책들에 까지 관심이 뻗쳤다. 여전히 소설은 나에게 사차원의 세계에서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해방구였으니 ‘미쓰다신조나, 기시유스케, 고쿄쿠 나츠히코, 고바야시야스미, 사와무라이치, 혼다테츠야, 마에카와유타카’등 수많은 미스터리와 호러, 추리 작가들의 전 작품을 다 읽고난 다음에는 연관검색어에 뜨는 또 다른 작가들의 책을 모조리 읽으며 마음껏 독서의 쾌락을 즐겼다. 물론 무라카미하루키등을 비롯한 유명한 작가들의 책도 모조리 읽었다. 당시에 지금의 e-book리더기 , 즉 전자책 기기가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라 기기의 성능이나 내구도는 형편없고 가격은 참 비쌌는데 그걸 한 5~6대를 부셔먹고 또 사고 부셔먹고 또 샀던 기억도 있다. 아참 내가 절대 읽지 않는 작가가 있으니 그건 모두가 좋아하는 히가시노 게이고다. 그냥 모두가 읽으니 난 보지 않겠다는 이상한 아집을 가지고 있다. 언제가 실제로 뵙게 되면 죄송하다고 말하고 그 때부터 읽을 예정이다.
책을 계속 읽다보니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몇 년 정도 했었다. 2017년 즈음 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살아오며 겪은 수많은 경험들이나 철학들을 에세이든 자기개발서든 뭐든 써 보고 싶었다 . 다만 책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작업이다. 일단 제목을 정해야 하고 목차를 뽑아야 하고 장제목과 꼭지제목을 정해야 하고 그걸 토대로 책을 organize하고 또 A4 백매가 넘는 분량을 쓴 다음 다 쓴 초고를 가지고 다시 고치고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며 가위질을 한바탕, 아니 몇 번이고 해야 한다. 물론 이런 지식도 그땐 없었고 무작정 한글프로그램을 띄워놓고 상념이나 사색이나 책의 감상 등을 한 두 페이지 썼었다.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 갑자기 또 책 쓰기 컨설팅을 받고 책 쓰기 과정에 돌입했다. 광고성우의 경험을 살려 누구나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사용할 수 잇다는 주제 하에 쓴 ‘좋은 말로 할 때 말 좀 합시다’( 2020 센세이션출판사)라는 책이 이 과정의 결과물이다. 근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깨에 매일 담이 올 정도로 쓰고 또 썼다. 경험을 지식으로 바꾸는 과정은 어렵고 또 매 순간순간이 신중해야 했다. 관련분야는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거나 언어병리학적으로만 접근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어치료나 언어병리학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대상자들이 조금 더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문이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나의 주제에는 또 맞지가 않아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았다. 결국 기존에 나온 스피치와 화술의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고, 그 중 나의 경험들과 일치하는 것들, 내가 이제까지 터득하여 해 왔던 방법 중 해외에서 인정을 받은 트레이닝방법과 일치하는 것들을 추려 자기개발서를 쓰게 되었다. (간단하게 회고하지만 공황장애, 허리디스크를 포함한 모든 질병이 그때 다 생겨났다.)
꼼꼼한 성격이 참 그때는 너무나 싫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다 쓴 초고를 3번을 다시 썼다. 이러다 영영 책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3권의 초고중 좋은 꼭지들을 골라서 퇴고를 마친 후 결국 책을 출간하였다. 감사하게도 출판당시 베스트셀러에도 올라가게 되었고 그 책을 읽은 분들 중 온라인 교육플랫폼운영을 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었고 독자들께서 참으로 좋은 , 감사한 리뷰들을 써 주셨기에 다시 그 책을 바탕으로 강의를 하고 , 클래스101, 클래스유, 탈잉과 같은 온라인 교육플랫폼들에 진출하게 되어 수천명이 넘는 수강생들에게 강의를 할 기회도 생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또 강의촬영과 영상편집을 배웠다.(하하..) 유명EBS강사의 편집자인 친구의 덕분으로 동영상강의 제작에 대해 배우게 되고 또 멋진 영상을 만들고 편집자와 더 세세하게 소통하고자 프리미어프로와 애프터이펙트를 배우게 된다. (물론 편집은 돈을 주고 맡겼지만....)
이쯤 되면 배움이 끝이 날 만도 한데 어찌된 놈의 뇌구조인지 배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결국 난 가천대학교 특수치료대학원 언어치료학과에 또 입학을 하게 된다. 원래 석사나 박사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으며 더군다나 대학원을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적이 없었다. 한데 어느 날 내가 운영하는 발성 목소리 클래스 ‘나만의 프리미엄목소리 만들기’를 통해 한 분이 찾아오셨고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또 언어치료대학원을 가게 된다.
그 분은 성인으로서 유창성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이른바 말더듬이라 불리는 언어장애다. ‘서. 서.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 ㅈ.제.제.제가 말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에 난 할 말이 없었다. 내 수업은 일반인 즉 언어를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는 전형인들을 위한 수업인데 한 가지 희망을 품고 나를 찾아온 그를 돌려보내는 마음이 참 슬펐다. 유창성장애로 인해 사람과 모이는 자리도 기피하고 최대한 말을 하지 않고, 대화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그 분의 돌아가는 뒷모습이 내내 눈에 밟혔다. 결국 난 내 지식이나 솔루션이 그들, 즉 정말로 말을 잘 하고 싶고 가슴에 사무치는 한이 되어 있는 ‘언어장애가 있는’ 분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려 다시 언어치료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게 작년 가을이다. (그 과정에서 무턱대고 네이버에 검색해서 불쑥 찾아온 낯선 사람에게 언어치료에 대해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신 임명순 언어치료사님이시자 선배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
들어가자마자 첫 학기에 신청해서 들었던 수업이 유창성장애였다. (웃음) 그 외에도 언어발달장애, 언어발달, 다양한 장애와 특수교육분야, 조음장애, 음성장애등등을 배운다. 의사소통에 문제나 지연이 있는 아동들과 성인들을 관찰하고 어떻게 치료할지 계획을 세우고 중재 방법 등을 배우고 있다. 새로 배우는 언어치료와 이전에 내가 했던 광고성우나 발성스피치에 대한 교육은 또 다르니 새 포도주에 맞는 새 부대를 만드느라 분주한 한 해가 또 훌쩍 지나가게 되었다. 내 헛된 희망은 또 다시 생겨나니 , 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언어치료를 할 수 있는 자격증까지 따게 되면 그때는 전형인(일반인),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강의와 치료를 할 수 있게 되어 , 그 모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모든 언어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언어의 해결사’ 가 되는 꿈이 생겨버린 것이다.
아 피곤한 배움의 삶이여. 아직도 공부해야할 학문이 너무나 많다. 얼마 전엔 일본 교토에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특강을 다녀왔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문화 차이에 따른 언어의 차이를 강의하고, 일본어에는 없는 음소들을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이나 조음기관의 올바른 사용법을 강의했고, 한국어의 받침이나 경음(ㄲㄸㅃ등)을 사용할 때 꼭 필요한 아랫배의 힘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그래서 ‘제가 소우루에소 일 했오소 한코쿠료리가 좋아요 ’와 같은 여행객 한국어가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강의를 하고 돌아왔다.
이 강의를 하고 났더니 또 외국인이 보는 한국어 자체에 대한 공부나, 일본어, 영어 문법으로 모국어를 익힌 한국어학습자에 대한 공부가 필요해졌다. 논문을 읽고 교재를 사서 읽고 또 강의를 해보면서 경험으로 공부를 하게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번 생은 아무래도 그냥 배움으로 흘러갈 것 같다. 배우고 그 배움으로 돈을 벌고 다시 그 돈으로 배움을 사게 되는 그런 생 말이다. 정말이지 피곤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