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보고서』리뷰와 에피소드
어디까지 참았어야 했을까? 한숨쉬듯 생각이 깊어간다.
경고하듯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
“쌤, 김영주예요.”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분노와 그와는 참 결이 다른 냉랭한 목소리.
“안녕하세요. 김영주님.”
“안녕 하냐구요? 쌤도 알다시피 내가 쿨한 사람이라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거든요. 근데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더라구요. 한마디 안 하면 천불이 날 거 같아 전화했어요.”
아무리 도발을 해와도 참아야 했고, 조심했어야 했다. 수업 도중 갑자기 툭 나오고만 '한마디 부사'에 대해 후회하던 중이었다. 수업 끝나고 20분이나 지났을까? 성마른 그녀 성격에 그리 빠른 것도 아니었다.
“쌤, 나 오늘 엄청 불쾌했거든요. 알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수업 중 김영주님께 따박따박…이라고 했죠. 수업에 방해된다는 생각에……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따박따박 뒷말은 또 뭐라고 하고 싶으셨을까요?”
“……짐작하신 대로일 겁니다.”
“그러니까요. 뭐라고 했을지, 본인 입으로 말해보죠!”
“따박따박 …… 끼어들지, 아니 말대꾸하지 마시라고요.”
“쌤, 우리 클래스 대부분이 쌤보다 연장자란 말이죠. 어디다 대고, 감히 따박따박.
내가 친구인 줄 알았나 봐.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어요?”
수차례 긴긴 사과를 하였으나, 내 빠른 자백에 맥이 빠진 건지 그녀는 좀처럼 분노를 삭히지 못했다. 다음 수업 시간에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겠다고 한 뒤에야 통화를 끊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까? 컨디션이 어떻네, 기분이 어떻네, 매일매일 잔소리를 해대는 여자. 웃으며 다독이면 수위를 높여서 징징댔고, 무시하면 수업 도중 불쑥 끼어들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김영주 씨는 왜 수업하기 싫다면서 매번 등록을 하고 빠짐없이 수업에 나오실까? 수강생들과 수업하면서 한 번도 누가 갑이고 을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였다. 그런데, 요즘은 수업하면서 내가 을이구나 하는 자존감 낮은 생각이 든다. 그녀의 갑질 때문일까? 이런 걸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둘 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회원님께 말실수를 하였고, 강사가 결정되면 수업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잠시 뒤, 센터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수업하고 싶은 선생님은 많으니, 다음 회차까지만 수업하라는 간결하고 직접적인 말을 돌려받았다. 그는 전후 사정을 물어보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나는 김영주 씨에게 고개 숙여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진심이었다. 그녀 때문에 늘 수업에 방해를 받았고, 나도 참을 만큼 참았으나 어떤 경우라도 강사가 말실수를 하면 안 되는 것이었고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갑게 웃으며 쌤이 이렇게 그만두면 남들이 자기 때문이라 생각할 테니, 한두 달만 더 수업해달라 제안했다. 자기는 쿨한 사람이라 금방 잊는다고도 하였다. '강사는 생계가 달린 직장을 잃었는데, 끝까지 자기 걱정만 하는구나.' 나는 요즘 많이 지쳐서 조심성 없이 말실수가 나온 거 같다고, 한동안 쉬고 싶고, 수업을 더 하려 해도 이미 강사가 결정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아주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상황을 파악한 듯, "길에서 보면 반갑게 인사해요. 모른척하기 없기야"라며 쿨하게 웃었다. 실수한 건 나이니 나도 고맙다고, 그러자고 하였다.
지금도 가끔 그녀의 살가운 말이 떠오른다.
“쌤, 나 쿨한 사람이야! 우리 겨우 한 살 터울인데, 말 놓고 친구 하자.”
첫 수업에 김영주 씨는 그렇게 말하였다.
'세상 쿨한 친구야! 친구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나는 자기 입으로 쿨하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살아보니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몇 달 뒤 김영주 씨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았으나 내가 다가가자 몸을 돌려 지나쳐버렸다. 차갑게 굳은 표정은 나를 부정하고 있었다.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쿨한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고, 안 궁금해도 궁금해하며 안부를 묻고 싶었다. 인간적으로 용기 내어 한 발 더 나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다시 한번 믿어보는 거, 그게 나를 살리는 길이니까.
나는 누구를 믿을 힘이 없다.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던 나는 이제 없었다.
"머리는 무슨 의미야?"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순신이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최대한 무심한 체하고 싶은지 시선은 식당 안 작은 텔레비전에 두었다.
"아는 대로잖아."
순신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보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나도 이거 먹는다."
순신이 단무지를 집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에 넣고 씹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구나. 단무지를 씹을 때면 얘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 창비, 2024)
대온실을 수리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한 번씩 수리할 수 있다면 어떨까?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 최대의 유리온실이었던 창경궁 대온실을 수리한다는 건 엄청 방대한 작업이고, 역사 속으로 깊이 감추어버린 사연을 들춰내 보면 막상 감당이 안 되어 가슴이 철렁할 수도 있다. 의사가 수술 집도를 하다가 지독한 종양이 너무 넓게 퍼져 손쓸 수 없을 때 환부를 덮듯이 덮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주인공과 이 역사적 작업을 맡은 사람들은 땅을 파내고라도 그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안에는 우리들의 무르춤한 인생 보고서 수십 권이 들어있었다.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대온실의 이야기이자 대온실의 운명을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공적으로는 조선왕조 치욕사이고, 사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대온실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진 영두와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영두는 서울에서 머무는 동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하는 억울한 일을 겪게 된다. 어린 영두가 가진 가장 좋은 장점이 사람을 믿는 마음이었는데 그 좋은 마음을 잃어버렸다. 겁에 질려 마음에도 없는 비굴한 사과까지 했는데, 상대의 갑질은 그녀를 무르춤하게 만들었다. 세상과 거짓으로 타협하는 비굴함을 겪으면서 영두는 감당하지 못했고 서울에 올라와 제일 잘한 일이라 생각한 순신과 어색한 이별을 하는 중이다. 미래를 포기하는 마당에도 솔직한 상황을 어린 연인에게 설명하지 못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상황을 정리하기 앞서 자기의 다친 감정을 먼저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억울한 상대에게 부당함을 주장하지 않고 삭히면 그 감정은 쉽게 화가 되어 자신을 갉아먹는다. 마음에 병이 되고 만다. 결국 영두는 마음의 병에 걸려버렸고, 영두를 향했던 두 친구의 갑질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순신까지 피해자로 만들었다. 아니 피해자라기보다는 순신을 슬프게 만들었다.
어린 영두의 삶은 늘 그래왔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을 지지해 줄 어른은 없었다. 영두 아빠는 최선을 다했으나 최선은 최선에 그치고 만다. 약자들의 최선은 종종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생명을 다한다. 그래서 영두는 나 힘들다, 도와달라 말하는 것이 실속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랑을 표현할 만한 경제적 힘이 없던 아빠와 살면서 어린 영두는 타협과 체념을 몸에 익혔고 어려운 상황을 당하면 그냥 말하지 않고 버텼다. 그럼에도 영두는 살기 위해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속없이 누군가를 잘 믿으며 살아왔다. 원서동에서 문자 할머니를 만났을 때는 자신의 미래도 꿈꿔볼 만하다 생각했고 사람들과 섞였고, 풋풋한 첫사랑도 품어보았으나 어이없는 갑질에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어 사람과 미래를 함께 포기한다. 영두의 마음속에서 가장 쓸만한 것을 잃었으니, 더 이상 서울에서는 미래를 꿈꿀 수 없다.
유치해야 마땅할 어린 커플의 결별은 수상하게도 덤덤하다. 헤어짐조차 에두른다. 눈앞에 놓인 슬픈 현실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 '나의 상처가 이만큼 벌어져 있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영두 앞에 고작 이별의 증표인 단무지를 씹으며 분노를 삭히는 순신. 일면 귀엽기도 하지만, 어찌해도 안되는 어려운 문제는 끄집어내지 않으려는 심사가 안쓰럽다. 영두는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는 걸 믿었지만, 어느 한순간 자신이 그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만 몰랐을 뿐 영두는 믿음의 끈을 아주 잠시 놓쳤을 뿐 늘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한 영향력은 친구의 조카인 산아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고, 마침내 시대에 묻힌 억울한 영혼도 불러낼 지대한 힘으로 발휘된다.
내재한 사연을 알고 나면 덜 아프고 덜 슬픈 역사가 몇이나 될까만은, 창경궁은 일제강점기라는 애꿎은 시대를 만나 희화화되었고, 인간을 비롯해 억울하거나 비참한 죽임을 당한 창경원의 생명체들은 애잔한 사연이 밝혀질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온실이라 불리는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완공되었다. 1909년이 어떤 해인가? 1910년 대한제국이 국권을 찬탈당하기 바로 전해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조선왕조의 상징인 왕궁을 원으로 격하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온실은 1909년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해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토 히로부미의 명으로 건립이 추진되었고, 일본인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유럽식 온실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대온실은 아름다웠다. 강제된 한 나라, 조선의 역사는 슬프지만, 건축물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슬픈 창경궁과 창덕궁은 일제강점기 어두운 역사를 통과하기 이전에도 슬픈 사연을 간직한 궁이었다. "이 문을 거쳐 참배하며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는 정조의 회한이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다. 여기서의 '이 문'은 창경원 동쪽 월근문으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으로 가기 위해 정조가 새로 지은 문이다. 그는 소수의 인원만 대동하여 이곳을 드나들며 아비를 그리워하였다. 김금희 작가는 이렇게 첨삭하였다. 슬픔으로 열고 그리움으로 닫는 문이라고.
창경궁은 2004년 철거와 재건을 통해 복원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돌려받았고 2011년에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구석구석 녹진 슬픔이 서려있는 창경궁과 서글픈 역사를 수면으로 급부상시킨 창경궁 대온실. 비록 슬픈 역사를 가진 대온실이지만, 이 슬픈 역사가 우리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본다. 영두의 경우처럼 아픈 과거도 좋은 미래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