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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근나 Jan 14. 2021

영화<두만강>
경계를 마주하는 방법

배타성에 대한 <두만강>의 서사

https://tv.naver.com/v/5711281

<두만강>. 한국영화인지, 중국영화인지, 프랑스의 자본으로 만들어져 프랑스영화라 해야 하는지 그 국적부터 애매한 영화. 영화의 이러한 태생적 사실조차 경계와 소통의 증거일까. 나는 이 영화에서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경계와 그 경계를 통한 소통의 방식을 말하고 싶다. 



그들이 경계를 마주하는 방법.


<두만강>은 두만강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사이에 두고 탈북자와 조선족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그들의 심리적 경계 또한 포착하게 한다. 그러나 경계로 나눠진 그 소속 안팎에서, 경계는 아슬아슬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 



© 네이버 영화


경계를 넘는 법 1


두만강을 넘나드는 이들에게 그 경계는 특별하지 않다. 생사를 바쳐 오가는 곳이지만 아주 보통의 것이다. 얼어붙은 강 위의 시체를 치우는 일, 또는 아이들이 죽는시늉을 놀이처럼 하는 일은 그들의 일상 중 하루일 뿐이다. 물리적 경계를 넘어 펼쳐진 새로운 세상에서, 경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비록 그곳을 넘다가 죽을지라도 무서운 일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탈북자와 조선족을 구분 지은 공간의 경계는 생각만큼 거창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두만강은 '경계'이면서 그것을 넘을 수 있기에 '통로'가 됐다. 접근성은 크나큰 소통이다. 강이 삶과 죽음의 경계로서, 죽음은 가까이 있는 듯하면서 그렇지 않은 모호함을 갖고, 그러한 죽음의 공간인 강은 경계의 모호함을 대변한다. 후반부 등장한 다리의 존재도 흐릿한 경계를 설명한다. 그 실존 여부가 애매하고, 이것이 다리로써 경계보다 통로라면, 소통의 의미가 강해진다.


경계를 넘는 법 2


동시에, 탈북자와 조선족 간의 언어적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은 심리적인 경계를 만들어낼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언어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공동체화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또한 ‘강 건너 사람들’, ‘저쪽 사람들’이라는 호칭은 그들이 강을 기준으로 주거 공간을 나누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로 대립하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언어는 그들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타자성을 허무는 요소로 작용한다. 때문에 물길을 기준으로 나눠진 특정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타이틀은 교류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를 기반으로 자연스레 관계는 형성된다. 영화의 큰 줄기를 이끌어가는 조선족 창호와 탈북자 정진의 우정을 보면 둘의 관계는 정말 평등하다. 그들의 약속, 그것은 명령이나 이행이 아닌 자신의 의지와 의리이며, 밥을 얻어먹는 것이나 도움을 받는 것도 둘 사이의 어떤 지배력이 작용하지 않는 우정이다. 


© 네이버 영화


경계, 순희.


그러나 평화롭던 마을을 영화는 평화로이 두지 않는다. 불미스러운 사건들의 잦은 발생으로, 마을은 혼란에 휩싸인다. 혼란을 짊어질 누군가가 필요했고, 공간의 다름이 그 누군가를 선택할 기준이 된다.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순간이다. ‘정부’의 개입과 함께 본격 구분 짓기 작업은 시작된다. 구조의 개입은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낸다. 서로 그 선 앞에서 멈칫거리며 타자화된 그들에게 선악, 상하 등 위계-이전까지 있었더라도 발견치 못했던-가 고개를 든다. 권력으로 인한 권력의 생성. 과연 새롭게 등장한 이 구조적 경계를 어찌 넘을 것인가.

    영화는 순희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순희의 등장으로 음성언어 사용자와 비사용자 사이의 경계가 생긴다. 이러한 장치와 그의 태도를 통해 그가 특정 프레임이나 경계의 적용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언어로 소통하는 이들조차 권력의 개입은 새로운 경계의 생성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순희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의 비상식적인 ‘천사성’과 연결되며 그 경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탈북자에게 겁탈을 당했음에도 탈북자에게 친절하다. 그를 겁탈한 것은 겁탈한 새x이지, 탈북자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즉 이는 순희가 그들을 탈북자라는 프레임에 넣어 타자화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경계를 무력화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말을 못 하던 순희의 “창호야”하는 날카로운 외침은 결국 창호와의 소통이다. 말하지 않으므로 경계를 소용없게 만든다던 그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건, 성립되지 않았던 경계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창호의 죽음이 정진과의 소통이었음을 그녀가 필연적으로 느낀 것인데, 이 작위적인 설정은 창호와 정진의 사라지는 경계를 지지한다. 순희는 소통을 위해 경계가 놓인 세상을 마주한다. 경계를 볼 수 있어야만 그곳을 넘을 수 있다. 촌장 할머니가 말해준 ‘다리’가 그토록 큰 인상을 남겼는지, 그는 결국 다리를 그려낸다. 다리의 소통성, 그 경계에 들어서는 것이 소통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 네이버 영화


다시, 경계를 마주하는 방법


프레임, 경계, 선 등 직선적이고 네모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단어들 가운데서 소통이라는 말랑한 단어가 그 바깥을 감싸는 영화. 자 이제 내가 만들어 놓은 경계들에 대한 자기 검열의 시간이 돌아왔다. 나 아닌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에 개입하는 여러 요소들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느냐 따라 경계의 모호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경계는 애초에 모호한 것이다. 필요성도, 그 존재도, 가능성도. 상대에게 배타적일수록 경계를 기준으로 한정적인 소통이 행해지고 이는 또 다른 배타성을 부른다. 악순환을 발견하기가 특별하지 않다. 내가 세워놓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얼마나 많은 악순환을 행했던가. 그러나 끝내 소통이다. 대신 그 경계 건너 무엇에 대한 타자성을 배제하고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통로로서의 소통으로 말랑함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경계를 마주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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