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살아간다는 것)>을 보고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바꾼 역사의 순간을 신봉해왔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굵직한 사건들-여러 혁명-을 평가할 때, 인간의 영향력은 결코 간과되지 않는다. 역사 앞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그 흐름을 좌지우지하며 변화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이 역사를 뒤바꾸는 일이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들여다보면 인간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보다 그 흐름에 줄곧 떠밀려 가고 있다.
<인생>이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으로 축약한 중국의 몇십 년은 마치 스포츠 게임과도 같았다. 호각지세의 경기처럼, 상황의 역전은 계속된다. 국민당 대신 공산당이 권력을 잡았고, 생계의 핵심이었던 그림자극 도구는 생계를 위협하는 흉물이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기 힘든 순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었고, 그렇기에 이 게임엔 형세를 바꿀 결정적인 한 방보다 최소한의 피해가 더 소중했다. 그러니 떠밀려 갈 수밖에.
버티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은 이 버팀의 흐름을 담아낸다. “인생”이라는 게임에 달린 것은 승패 정도가 아니라, 생계였다. 목숨이자 삶이었다. 주인공 가족처럼 수만, 수억 명의 사람들이 ‘살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역사의 파도에 떠밀려도, 목숨을 부지하며 덜 다치며 흘러가야 한다.
푸꾸웨이(갈우)는 아들 요우칭에게 “소가 자라면 공산주의가 된다”고 말한다. 대약진운동은 공산주의의 흐름을 낳았고, 인민들에게 이러한 공산주의는 그저 ‘삶의 나은 흐름’이었다. 국민당이 권력을 잡든 공산당이 권력을 잡든, 이데올로기든 정치사상이든 뭐든 간에 그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데 좀 더 나은 흐름이 주어지느냐, 그것뿐이었다.
더 나은 흐름을 갈망하며 버티던 푸꾸웨이 가족은, 흘러가다 못해 휩쓸려 버린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가족들은 흩어지고 사라진다. 아들 요우칭과 딸 펑시아의 사망은 파도를 버티다 암초를 만난 나룻배가 침몰하는, 불행한 사고처럼 묘사된다.
영화는 이 죽음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푸꾸웨이(갈우)와 찌아전(공리)을 통해 인간의 무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누구라도 시대를 탓하게 되지만 영화 속 그 누구도 현실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저 ‘살아가는 것’을 위해 어떻게든 그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혁명(革命)은 정말 인간의 것이 아닌 걸까? 역사에 그어진 획들은 수많은 혁명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역사를 흐르는 인간이 그 흐름을 어떻게 다뤄야 역사가 바뀌는 걸까. 운명의 변혁은 어떻게 일어날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쓸려가는 것보다 이 거대한 바다를 잘 버티고 잘 흘러가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헤엄치는 법을 배워보는 건 어떤가. 바람의 방향도 생각해보고 부력의 원리도 가끔은 생각하면서, 숨을 참고 숨을 쉬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거다. 조금이라도 스스로 나아가고, 조금이라도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역류(歷流)이자 역류(逆流)의 시작이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368
문화예술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