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과학적 고찰

운명과 우연 그 사이 어디쯤.

by 인생은 꽃

운명과 우연 그 사이 어디쯤.

가끔 시간이 많아 질 때면 저는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서, 혹은 지쳐서라기보단 그냥 순수한 궁금증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라는 사람에 국한된 고민이라기보단 사람은 왜 사는가, 더 나아가 생명은 왜 존속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즐기는 편입니다. 답도 없고 심오한 이 질문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일상에서 나를 괴롭히는 자잘한 문제들이 아주 미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철학자가 되어 신의 생각을 엿보려는 것 같아 우쭐해지기도 합니다.


생태공학을 전공한 저는 대학에서 진화론을 배웠습니다. 한 생명의 발생과 진화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지루한 학술용어와 이론들로 설명되지만, 그 생명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과 가치들을 따져보자면 문과와 이과의 통합이고 그야말로 로맨틱한 과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생물은 그저 환경이라는 작용과 진화라는 반작용의 산물일 수 있지만, 과연 이 모든 것에 목적이 있을까? 신적 존재의 위대한 계획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이 모든 건 눈먼 시계공의 무지성한 작업일까 궁금합니다.


이 상념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생명의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사람 개개인이 아니 라인류를 하나의 종으로 보고, 호모사피엔스의 차원에서 찾습니다. 흔히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는 가족이기도 있고,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기도 하고, 쾌락이나 성공, 혹은 인류에 이바지하는 어떤 거창한 목표이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삶의 목표나 의미가 모두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인류를 지구상의 수많은 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봅니다. 사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인간도 생물학적으로는 그저 생명의 나무에 한 가지(branch)를 차지하고 있는 종일뿐이니까요.



생에 대한 집착

사람은 모두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은 존엄하고 모두의 삶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살인을 중범죄로 다루고 살인자를 엄중한 처벌로 다스립니다. 그렇다면 사람만 그런가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잇따른 비로 홍수가 나고 관련 뉴스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나면 작고 힘없는 곤충들, 이를테면 개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요?

물에 빠진 불개미 떼가 스스로 뗏목을 만들어 생존하는 모습

사람도 못 당하는 홍수를 개미가 어쩔까 싶지만, 개미들은 기가 막힌 방법으로 자연재해에서 살아남습니다. 홍수가 나면 개미들은 몇천에서 몇만 마리가 모여 뗏목을 만들어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떠다닌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물 쪽에서 뗏목을 떠받치는 집단과, 위쪽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집단이 나뉘어서 지속적인 순환을 통해 희생과 생존을 분담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홍수가 난 지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고, 많은 실험을 통해 확인된 특성이라고 합니다.


바닷속에 사는 멍게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생에 대한 집착을 보입니다. 멍게의 유생은 마치 올챙이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자유롭게 부유하는 생태인데요, 짧은 유생 기를 지난 멍게는 바위 같은 적당한 곳에 붙어 평생을 고착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성체 멍게는 필요 없어진 꼬리나 근육, 심지어는 신경기관(뇌)마저도 퇴화 및 소화를 해버립니다. 생태학에서는 멍게는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의 시선에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살까 싶을 수도 있습니다. 팔도 다리도 다 포기하고 심지어는 뇌까지 포기한다면 그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멍게는 많은 걸 포기하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던 겁니다.

작가의 의도는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삶에 대한 집착을 읽었다.

꼭 동물에 국한된 얘기는 아닙니다. 식물은 언뜻 한없이 약하고 수동적인 생명으로 느껴지지만 생명력은 누구보다 끊질깁니다.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잡초나, 극한 환경에서 몇백 년을 내생포자 형태로 동면하다가 깨어나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세균(버섯)을 보면 그 집착은 인간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016년 맨부커 상을 수상했던 화제작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요, 작중의 영혜라는 인물은 어느 날 밤의 꿈을 계기로 갑자기 육식을 끊고 채식을 시작하더니 점점 메말라가고 급기야는 스스로를 식물이라 믿으며 식음을 전폐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녀가 자기 파괴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식물의 생명력을 생각하면 제게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집착으로 읽혔습니다.

- 나,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그러지. 그렇지.
-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채식주의자 中>

이 모든 생명이 그렇게 생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요? 길가의 개미가 '으아아 난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라고 생각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생명은 일단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뉴턴의 사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고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이유'에 의한 거라면 생에 대한 집착도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도대체 왜 생명이 있는 것들은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을까요?



생명의 존재 이유

이 글에서 감히 삶의 목적에 정답을 단정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대학에서 생태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할 때 느꼈던 건 거의 모든 생물들이 치열하게 살아남아하는 것이 결국 번식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몇 가지 동물을 보겠습니다.


문어의 생이 잘 나타난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문어는 문(文)어라는 이름답게 지능이 강아지나 고양이 수준으로 몸통의 뇌뿐만 아니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8개의 다리로도 생각을 합니다. 그런 문어는 보통 1-2년 정도로 매우 짧게 사는데, 마지막 3-6개월은 알을 품다 죽습니다. 알을 품는 암컷 문어는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며 알을 돌보고 알이 부화하면 기력이 다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부화한 문어들 중에 극소수가 살아남아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에 따라 다시 위장을 하고, 상어를 피하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들과 장난을 치며 짧은 생을 삽니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지만, 그게 문어의 생이죠.


연어는 훨씬 유명합니다. 연어는 산란기가 되면 자신이 태어나 자란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는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죠. 안전하고 더 나은 환경에 알을 낳기 위해 연어는 목숨을 다해 물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연어가 죽기도 하고, 끝내 도착한 개체들도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알을 낳고 얼마 안 가 자신이 태어난 강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생존에는 거추장스럽지만 암컷에게 어필하는 수사슴의 뿔

사슴의 뿔 역시 흥미롭습니다. 수사슴은 생존에 유리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대비되는 성선택(sexual selection)을 따라 더 크고 더 아름다운 뿔을 갖게 됩니다. 다른 수사슴보다 우월한 뿔을 가진 수사슴은 암컷에게 인기가 많아 번식에 성공하겠지만, 포식자의 눈에 더 잘 띌 위험, 또 도망가다가 가지에 걸려 넘어질 더 큰 위험에 노출된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체에게서 난 자손 역시 우월하고 위험한 뿔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 외에도 짝짓기가 끝나고 나면 바로 암컷의 영양분이 되어 머리를 뜯어 먹히는 사마귀나,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녹여 새끼를 먹이고 결국 껍질만 남아 죽는 벨벳거미 등등 너무나도 많은 종들이 삶의 집착을 벗어던지면서까지 자손을 남깁니다. 생존본능을 뛰어넘는 본능인 거죠. 모성애라는 감성적인 선에서 이해하기는 힘들 정도로 극단적인 생태가 많습니다.


자손을 남긴 많은 생명체가 마치 이제는 내 삶의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미련 없이 죽어버립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사람도 자손을 남기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류 발생이래 꾸준히 커가고 있는 인구수도 이런 본능 덕분에 가능했겠죠.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거든, 좀 더 고등한 어떤 의식에 의한 거든 수많은 종들은 이 종의 존속 메커니즘에 의해 라이프 사이클을 돌립니다.



번식이 뭐길래?

생명의 존재 이유가 정말 번식이라면, 이 고민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왜 생명체는 그렇게 자손을 남기고 싶어 할까요? 자손을 낳으면 그 자손이 또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은 또 자손을 낳고, 때로는 희생을 반복하며 자손을 낳습니다. 이 메커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도대체 뭘까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정말 그럴듯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는 생물 진화의 주체를 유전자로 정의히고, 생물들은 모두 유전자의 자가복제 속에서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이 존속할 수 있는 방법은 번식을 통한 유전자 전달입니다. 언젠가 길에서 낙서를 봤는데, 저와 너무 비슷한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어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한강 다리를 건너다 발견한 한 철학자(?)의 낙서

종이 존속하는 이유가 정말 있다면, 현재로서는 가장 그럴듯한 설명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유전자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제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기적 유전자'에 각인된 종의 존속 본능에 의해,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고 있다고 착각을 한채 거대한 우주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운반체로요.


딩크족인 나, 돌연변이?

이런 흐름으로 상념에 빠져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최후의 질문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자손을 낳을 의지가 없는가.


비단 저뿐만은 아닙니다. 흔히 DINK (Double Income, No Kid)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죠.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문화학적, 경제학적으로 아주 많은 아젠다를 던집니다. 하지만 오직 생물학적인 시선에서 본다면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나도, 비혼주의나 동성애도 돌연변이입니다. 물론 인간만이 특별한 건 아닙니다. 동물들은 멍청해서 자식을 낳고, 인간은 똑똑해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동성애는 동물 사이에서도 많이 관찰이 되고,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동물 사회에서는 저처럼 아이를 낳지 않고 도망가는 개체가 있을 수도 있죠. 1년이 지나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문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종에는 outlier가 있으니 그게 이상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outlier가 많아진다는 건 조금 이상합니다. 생명의 존재 목적이 종의 존속이라면 뭔가 잘못된 겁니다.

개체군의 생장 곡선

굳이 설명을 시도해 보자면, 개체군 생태학에 S자 생장곡선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개체군 내의 개체수는 시간에 따라 증가하지만, J자형의 이론적 생장 곡선과 달리, 환경 저항 때문에 실제로는 S자의 완만한 S자 생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페트리접시 안의 박테리아가 처음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배지 자원이 모자라지면 서로 경쟁을 통해 증가가 더뎌지는 원리입니다.


이 이론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환경저항은 지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우리의 개체수를 조정하고 있는 거죠. 요즘 들어 부쩍 많아진 자연재해나 기후변화, 뉴스에서 말하는 지구가 보내는 경고가 모두 환경 저항입니다. outlier가 늘어나는 것 역시 우리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mother earth가 교묘하게 조종하는 거대한 masterplan이 아닐까요?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생명의 기본적인 생에 대한 집착, 그 집착을 뛰어넘는 종(유전자)의 집착,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지구의 계획, 자정 작용. 이기적 유전자의 의도된 이타적 행동인지, 혹은 모든 걸 뛰어넘는 지구의 계획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직 범접할 수 없는 신의 뜻인지 알 수 없지만 번식 의지가 결여된 저 같은 outlier도 어쩌면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세계인구는 늘어나고 있는 걸?

... 사실 이 이론은 흥미로울 수는 있어도 억지스럽습니다. 인구 증가가 계속 더뎌지는 대한민국을 닫힌계로 본다면 그럴듯할 수도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인구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지구 입장에서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 그때가 온다면, 우리는 예정된 죽음처럼 알아서 자각도 하지 못한 채 개체수를 조절할지도 모르죠. 성경에 나온 노아의 방주가 현실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월해진 어떤 존재가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한 나머지 소멸하고 지금이 대략 3-4번째 지적존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당신의 생각. 운명과 우연 그 사이 어디쯤.

이 글은 몇 가지 가정을 가지고 내가 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에게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가치를 뛰어넘는 다양한 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인간도 생물의 종들 가운데 하나라는 시선에서 생각을 이어나갔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삶이, 나의 존재가 어떤 절대자의 예리한 계산 속에 정해진 운명 같은 거였으면 좋을까요, 아니면 무지성할지언정 어떠한 제어도 없는 우연인게 좋으신가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우리 모두의 목적이 뭔지 궁금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나와서 토론하면 얼마나 흥미로울까요? :)





로맨틱 사이언스

과학, 문학, 예술, 철학이 어우러지는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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