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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은 기억이 있으십니까?

공포기억 제거술. Obliviate(오블리비아테)

by 인생은 꽃 Jul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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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공포 기억을 저장하고 소거하는 원리가 시냅스 단위에서 규명됐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이 이광자 현미경과 '듀얼-이그래스프(dual-eGRASP)' 기술을 접목해 공포와 관련한 기억의 형성과 소거에 따른 시냅스 변화를 관찰했다고 17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6일(현지시간) 게재됐다.

                                                                                           
- 동아사이언스 2월 17일 자-   


잊고 싶은 기억, 혹은 잊어야 살 수 있는 공포 기억

이너널선샤인의 한 장면이너널선샤인의 한 장면

짐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 아시나요? 한겨울에 만나 강렬한 사랑을 하다가 서로에 대한 아픈 기억만 남기고 헤어지게 된 연인이 그 괴로운 추억을 없애기 위해 기억 제거술을 받습니다. 남자는 기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숨기고 도망칩니다. 2004년 당시 영화는 멜로영화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포맷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죠.   

브런치 글 이미지 2

또 '해리포터'시리즈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기억하시겠지만, 죽음의 성물 1부에서 헤르미온느가 볼드모트와 싸우러 가기 전 부모님에게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게 만드는 오블리비아테 (= forget) 주문을 걸죠. 마법에 걸린 부모님은 딸의 존재를 완벽히 잊게 됩니다.


기억을 인위적으로 조절한다니.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2023년 현재는 과학적인 설명을 달고 학술지에 발표가 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사실 갑자기 튀어나온 기술은 아닙니다. 삶을 갉아먹는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병리학적으로 돕기 위한 연구는 늘 진행되어 왔고, 2011년에도, 2019년에도 2023년에도 국내외에서 성과가 발표되어 왔습니다. 앞서 말한 영화의 사례들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전쟁 퇴역 군인의 트라우마성폭력 피해자나 아동 학대 피해자의 신경성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용도라면 분명 유의미할 겁니다. 따라서 이 글은 여러 종류의 기억 중에서도 공포 기억에 대한 제어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한 가지 기억이 아니다.

공포기억을 설명하려는 글에서 엄청난 뇌과학 개론을 설명하진 않겠지만, '기억'에 대한 기본적인 분류 정도는 해보겠습니다. Atkinson과 Shiffrin의 중다체계이론에서 기억은 감각기억, 작업기억, 그리고 장기기억으로 나뉘며, 각각이 저장되는 뇌 부위도 상이합니다. 그중 장기기억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억(memory)'인데, 이 장기기억은 다시 서술적 기억(declarative)과 비서술적 기억(non-declarative)으로 나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서술적 기억>

의미기억 (FACT ; Semantic memory) :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의 종류. 각종 어휘, 언어적 개념들,  세상사  등에 대한 지식

일화기억(EVENT ; Episodic memory) : 일반적으로 말하는 '추억' 정도. 개인이 경험하는 각종 사건들.


<비서술적 기억>

절차적 기억 (SKILLS AND HABITS ; Precedural memory) - 자전거를 타는 방법, 걷는 방법 등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몸에 익은' 기억.

지각적 점화(Perceptual priming) -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불완전한 지식을 완성시키는 기억. 예를 들어 병원직원에게 nu___를 보여주면, nurse를 연상시키는 예.

조건 형성(SIMPLE CLASSICAL CONDITIONING) - '파블로프의 개'로 더 유명한 기억의 종류.

비연합 학습(NONASSOCIATIVE LEARNING) - 계속된 자극의 반복으로 반응이 저하되는 habituation.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기억은 저장되는 뇌 부위도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억 저장소인 '해마(Hippocampus)'는 서술적 기억이 저장되는 곳으로, 분명 기억에 있어 충추적인 역할을 하지만 전반적인 기억을 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각기억만 해도 각각의 감각을 담당하는 뇌 부분에서 형성되고, 작업기억은 빨리 실행에 옮길 수 있게 전전두엽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체계의 분리는 인지심리학에서 정상인과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연구에서 밝혀내었으며, 이후 인지신경과학적 연구에서 뇌의 기능 구조 및 과정 측면에서 연구한 결과 이러한 기억체계 각각을 담당하는 뇌 부위들과 신경기작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각 기억종류를 더 파헤치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으므로 각설하고 '공포'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기억들 중 조건형성(simple classical conditioning)은 다시 감정조절운동반응으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 감정조절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이 편도체(Amygdala)입니다.

측두엽 변연계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와 해마(Hippocampus)측두엽 변연계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와 해마(Hippocampus)


의외로 생존에 필수?

편도체해마와 떼려야 뗼 수 없는 관계로 측두엽 변연계에 자리 잡고 정서적 기억 측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편도체는 시상과 대뇌 피질로부터 감각정보를 받아들이며, 뇌간 영역으로 신호를 내보내는데, 이외에도 편도체는 해마와 솔기핵, 시상하부와도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합니다. 편도체가 해마와 아주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해마가 손상되는 환자는 이 부위가 함께 손상되기도 해서 편도체의 역할을 분리해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편도체는 서술기억 자체에는 제한적인 역할만을 하고,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연합된 경험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다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편도체는 생태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냥 기억의 차원이 아닌,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죠. 공포를 피해야 한다는 본능. 약한 동물이 포식자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편도체의 공포 기억 덕분입니다. 동물의 편도체를 파괴하면 본능적인 공격성, 두려움등이 사라지기 때문에 쥐의 편도체를 파괴할 경우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야생 스라소니의 편도체를 파괴하면 매우 얌전해진다고 합니다. 또 사람의 편도체가 손상될 경우 지능은 정상이지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공격적이게 된다고 합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편도체 손상 환자 SM 이야기

해마의 HM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인지신경과학의 유명한 환자가 바로 SM입니다. SM은 양측뇌에서 제한적으로 편도체에만 손상을 입은 매우 희귀한(?) 환자 케이스였습니다. 불쌍한 그녀를 통해 의학은 편도체가 공포에만 제한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브런치 글 이미지 6

사진의 왼쪽이 CONTROL, 즉 정상인의 관찰입니다. 정상인은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의 눈을 관찰해 가며 그것이 '공포'의 표정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SM은 엉뚱한 곳만 보다가 그것이 공포라는 것을 결국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더 단적인 예로, 편도체에 손상을 입은 그녀는 HAPPY FACE, SAD FACE, SUPPRISED FACE, DISGUSTED FACE, ANGRY FACE를 그려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그녀는 모든 표정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지만, AFRAID FACE를 그려보라는 지시에는 갸웃거리다가 기괴하게도 기어 다니는

아기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소 소름이 돋는 실험 결과입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7



공포의 종말을 위해

앞서 얘기한 것처럼 생태학적으로 공포기억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공포는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공포입니다. 병리학적으로 사람의 삶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공포 기억은 기억 자체를 지우든, 공포의 느낌을 지우든, 기술이 발전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환자 SM처럼 편도체에 무작위 손상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위험할 뿐만 아니라, 그건 특정한 '기억'을 제어하는 게 아니라 '본능' 그 자체를 제어하는 거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가 아닙니다.   


공포기억을 없애려는 시도는 이전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공포기억의 소거(extinction of fear)는 '이터널 선샤인' 같은 영화처럼 아예 그 기억을 삭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의 공포 기억 소거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와 공포와 상관없는 자극들이 더 이상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배우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어둠 속에서 귀신이 튀어나오는 영화를 보며 어둠과 귀신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이는 뇌에게, 어둠과 귀신을 분리함으로써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는 거죠.


이를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시냅스 연결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시냅스는 우리가 흔히 뇌세포라고 말하는 뉴런(Neuron)과 뉴런 사이에서 신호를 주고받는 부위인데요. 우리의 기억은 무려 800억 개가 넘는 뉴런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100조 개가량의 시냅스로 인해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기억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런과 뉴런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신호가 추억과 기억의 형태로 변화되어 개개인의 정체성을 이룬다는 점 역시 굉장히 흥미롭죠)

브런치 글 이미지 8

결국 공포 기억의 종말을 위해선 시냅스를 이해해야 합니다. 공포기억은 대부분 편도체로 대표되지만, 당연히 편도체 혼자서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 본 적도 없는 귀신을 우리가 무서워하는 이유는, 학습된 공포(Instructed fear)가 있기 때문이며, 이는 의식적인 공포기억으로 해마의 장기기억이 관여한다. 공포와 같은 감정의 조절은 시상(감각정보 전달), 해마(장기기억 저장), 전전두엽(고차원적 인지기능), 편도체(감정 저장)등의 다양한 부위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포 기억 제거의 핵심 비밀은 역시 시냅스  

공포에 대한 동물 연구는 보통 공포 조건 반사실험(Fear Conditioning)으로 설계됩니다. 이는 암묵적 공포기억으로, 쥐에게 어떤 전기충격 등 스트레스를 가할 때 조명이나 소리로 조건을 달아주고, 후에 스트레스 없이 조건만 주어졌을 때, 편도체의 세포활동지수를 보는 등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그림처럼 공포기억의 상태를 학습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따라 변화하는 시냅스를 연구하기도 합니다.

공포기억의 상태에 따른 기억저장 시냅스의 구조변화 @서울대학교 강봉균 교수 연구실공포기억의 상태에 따른 기억저장 시냅스의 구조변화 @서울대학교 강봉균 교수 연구실


이 실험에서 연구팀은 dual-eGRASP라는 기술을 개발해 서로 다른 신경 세포로부터 온 연결 시냅스를 청록색과 노란색으로 구분하고, 시냅스가 공포 기억의 학습이나 소거에 따라 어떻게 크기가 변화하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실험을 확장시키면, 특정 공포를 떠올릴 때 발현되는 시냅스를 제어하여 공포 연관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보다 약 10년 전인 2011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뇌과학연구소에서 진행한 실험에서는 공포기억의 소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상의 PLCβ4 유전자를 촉진하여 관련기억을 지운다고 했습니다. 연구팀은 공포기억 소멸을 못하도록 PLCβ4 유전자 발현을 억제한 돌연변이 생쥐에게 '단발성 발화'를 흘려준 결과 생쥐의 공포기억 소멸이 회복됨을 확인함으로써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그 외에도 편도체에는 뇌세포 보호를 위한 방어막이 있는데, 쥐의 경우 생후 3주 이후에 형성되어 그전엔 공포기억의 저장이 원활하지 않아 해당 기억이 잘 사라진다고 합니다. 2009년 한 스위스 연구팀은 이 방어막을 인위적으로 없앨 수 있는 약제를 만든다면 공포기억을 조절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연구들이 실제로 유의미한 결과들을 낳으며 계속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공포를 추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포를 추억하는 그날, 어쩌면 또 다른 공포가 시작될지도

기억의 소멸.. 그것은 어쩌면 정말로 무서운 영역입니다. 기억의 '소멸'이 가능하다면 언제가 멀지 않은 미래에는 기억의 '생성'도 가능해질 것이고, 그것은 쉽게 기억의 '조작'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바야흐로 인셉션의 시대가 오는 겁니다. 이는 이후에 인간 복제 이상의 윤리적 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행복한 기억이든 죽을 만큼 힘든 기억이든, 자신이 겪은 일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한다는 의견과, 과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아픈 기억은 소멸되게끔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견 사이에서 팽팽한 가치 논란이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폭행 경험이나, 전쟁, 학대 경험 등 신경성 질환을 일으킬 만큼 날카로운 공포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과학 발전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죠. 과학의 발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무섭고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 기술이 여러 부작용을 딛고 일어나 언제쯤 사람에게 적용 가능해질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사고 팔리는 생물학적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벌써 오래전 얘기 같지만, 대학교에서 저는 뇌인지과학을 부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 수업을 들을 때와 신경과학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 과학을 공부했던 이과생으로서는 '뇌'가 언급되는 신경과학에 더 애정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리학으로든 신경학으로든 기억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뇌과학의 부흥이 일어난 뒤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직 빙산의 일각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흔히들 뇌가 우주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동감하는 저로서는 이런 과학적 발견 하나하나가 너무 흥미롭습니다.





로맨틱 사이언스

과학, 문학, 예술, 철학이 어우러지는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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